나는 기억에 관련된 소설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내가 베르그손 사상(특히 <물질과 기억>)에 경도되어 있기에 그렇다. 기억에 관련된 소설은 무척 많다. 그중에서도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나 알랭 로그브리예의 <되풀이> 정도의 작품들은 정말 인상 깊게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인상 깊다’라 함은 내 취향에 부합한다는 말과도 같다.
물론 줄리언 반즈의 ‘기억의 파노라마’ 작품 세트도 재밌게 읽었다. 특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11페이지에 나오는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라는 문장은 이 소재의 모든 작품 해석의 치트키라 할 수 있다. 기억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해설 틀이기에.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여기 기억을 소재로 하는 또 하나의 작품 <오래된 빛>이 있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 언제나 회자되는 작가 중 한 명인 존 밴빌의 장편소설. 알라딘 소설 장인 뽈님이 별 다섯 개를 준 불후의 명작 중 하나. 그래서 무조건 읽어야 할 리스트에 포함하여 읽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대실망. 내가 가장 싫어하는 소설 분야인 누보로망 계열과 비슷한 전개로 나를 당혹케 했다. 작가는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사랑의 무의미함?' 아니면 '사랑과 상실?' 또는 '기억의 속임수에 대한 섬세한 탐구?' 뭐 인물들 간의 관계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작가가 이 작품을 왜 썼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역자의 해설을 보면 이 소설이 ‘앨릭스와 캐스 클리크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라나. 그래서 의미는 있겠다 싶다. 하지만 전작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작품만 읽으니 궁금증만 증폭되고, 줄거리와 관계없는 외부 풍경 묘사나 행동 하나하나를 지리할 정도로 늘어뜨려 묘사하는 스타일은 질린다. 알랭 로그브리예의 <질투>을 연상시킨다.
나는 이런 작품을 정말 싫어한다. 재미가 정말 없기 때문. 욘 포세만큼은 지루하지 않지만 그래도 읽기가 고역이다. 뒤에 ‘뭔가가 있겠지’ 하며 던져 놓은 떡밥 때문에 꾸역꾸역 읽는 정도. 이런 류의 소설이 문체는 좋다고 하는데, 아포리즘과 같은 멋진 문장은 만나볼 수 없다. 진짜 줄 친 부분이 단 한 줄도 없다.
사실 소설 초반부를 읽고 매우 느낌이 좋았다. 이 책을 추천하는 분들도 대부분 좋다고 하고, 알라딘 평점이 무려 9.2라서 기대가 정말 컸다. <타타르인의 사막>과 같은 기대를 갖고 봤다. 더군다나 소설의 첫 부분은 너무도 매력적으로 시작해서 몰입도가 컸다. 초반부 읽고 나도 여기저기 추천을 해댔다.
“빌리 그레이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나는 그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졌다. 사랑은 너무 강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이 경우에 적용될 더 약한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 모든 일은 반백 년 전에 일어났다. 나는 열다섯 살이었고 미시즈 그레이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p13)
15살 소년과 35살 유부녀의 육체적 사랑 놀음(불완전한 기억). 이것은 볼만했다. 전체 플롯에서 뭔가 상징적 메타포가 숨겨져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고, 현실의 인물과 영화적 서사(주인공이 출연하는 영화)에서 영향을 주고받는 뭔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 말이다.
여기에 주인공 알랙시 딸 캐스의 죽음과 영화 주인공(알랙시가 연기하는 인물) 인물과의 어떤 관계가 그려져 과거 알랙시의 왜곡된 사랑이 어떻게 딸의 죽음에 영향을 미칠지 궁금했다. 작가가 어떻게 플롯의 구조를 짤지 계속 기대하면서 봤는데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실망감은 커졌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이건 중간에 덮었어야 했다.
15세 때 미시즈 그레이와의 짧은 사랑, 딸 캐스의 죽음 그리고 돈 데번포트와의 영화 이야기가 완전히 따로 노는 느낌이 너무 강했다. 과거의 이상한 사랑은 현실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딸은 도대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도 제시되지 않는다. 알랙시는 딸이 죽은 곳으로 왜 데번포트과 같이 갔을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미시즈 그레이와 벌였던 15세 알랙시의 기억은 미시즈 그레이의 딸에 의해 왜곡된 기억으로 밝혀졌지만 그 왜곡이 사건을 전복시키지도 딸의 죽음을 밝혀주는 메타포로도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독자는 그런 것을 기대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다는 말씀. 내가 전작을 읽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읽었다 하더라도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여러 소설 속 장치들을 들여다보는 수고를 들여야겠지. 해설을 읽으니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런 재미없는 작품을 두 권을 더 읽느니 차라리 읽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하다.
이 작품을 읽고 ‘쓸쓸한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정말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독자들일 거다. 윌리엄 트레버 작품을 보면 ‘쓸쓸한 아름다움’이 뭔지 단박에 느낄 수 있는데, 이 소설은 정말 그런 느낌이 아니다. 흐릿한 안개 속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이마를 땅에 찢는 그런 느낌이다.
“이제 그는 백만 — 십억 — 일조! — 마일을 거쳐 우리에게 도달하는 은하의 오래된 빛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여기, 이 테이블에서도 내 눈의 이미지라는 빛이 선생님 눈에 도달하는 데는 시간, 아주 작은 시간, 극소량이기는 하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따라서 어디를 보든, 어디에서나, 우리는 과거를 보고 있는 겁니다.” (p254)
그래, 과거를 봐서 어쩌라고?! 과거의 사랑과 상실이 쓸쓸한 삶의 현재를 구축한다는 이 진부한 주제를 아름답게 포장해도 내용이 없다면(심리 그 자체가 내용이라면) 공허하다.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든 생각이다.
총평 : 정말 무의미하고 재미없는 작품이다.
[덧] 소설을 읽고 좋다고 하는 건 매우 주관적이다. 내게는 좋은데 다른 이들에게는 별로인게 이 주관성의 특성이다. 헌데 내가 읽고 좋아 추천했는데 다른 이들도 좋다고 하면 더욱이 그 수가 많으면 주관의 객관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 나는 좀 이 부분이 항상 신기하다. 그렇다라도 누구나 좋아할 수는 없다. 다른 이들이 다 좋다고 해도 내가 별로인 작품은 항상 출현한다. <오래된 빛>은 내게 바로 그런 소설이다. 추천받은 작품들은 대체로 좋다. 하지만 완벽한 예외도 있다. 그래서 개인의 특수성은 여전히 건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