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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양심
진짜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듣는 것이.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은 30대 이후 처음인 것 같고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듣는 것도 8년 만인듯하다. 무엇보다 교향곡을 오케스트라 실황을 영접하는 건 내 생애 처음이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은 말해서 무엇하랴.

어쨌거나 어제(토요일)  갑자기 지인이 나눔 티켓이 생겼다고 급히 디엠을 주셨다. 난 일요일 특별한 일정이 없어 작업하려고 했다. 근데 갑자기 홍콩필 티켓이 생겼다고 지인 p님이 내게 참석을 권유하신 거다. 정말 의외이고,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듯해서 바로 접수했다. 



그래서 예습할 겸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교향곡 5번을 들었는데, 모두 익숙한 곡이었다. 특히 교향곡 5번은 딱 내 스타일. 그래서 기대를 안고 예술의 전당에 도착했다. 오후 4시가 좀 안 된 이른 시간. 열차가 딱딱 와줘서 너무 일찍 왔는데, 다행히도 Y님도 좀 일찍 도착해서 무료하지 않게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이 보게된 A님이 20분 정도 일찍 도착해 진은숙 및 찰스 쾅에 대한 얘기를 해주셔서 재밌게 기다릴 수 있었다. 티켓나눔 해 주신 k님이 도착해서 표를 나눠 갖고 S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10.19. 일요일 오후 5시.
                                       *연주 프로그램*
지휘자 :  리오 쿠오크만피아노 : 선우예권연주 :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 진은숙    수비토 콘 포르차(Subito con Forza) 5'
2. 찰스 쾅    페스티나 렌테 질여풍, 서여림(Festina lente 疾如風, 徐如林) 6'
3.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단조 Op.23 피아노: 선우예권  32'
Intermission   20'
4.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e단조 Op.64    44'


S석. 1층 A블록 17열 7, 8, 9번. 배정받은 좌석이다. 앉아서 차례로 감상했다. 먼저 <수비토 콘 포르차>. 연주 시간 5분. 피아노 진은숙이 협주했는데, 존재감이 정말 미미했다. A님 왈 진은숙이 진중권 친누나라고. 어쨌거나 현대 음악을 처음 들어서 그런지 넘 난해했고 내 취향이 아니었다. 이 곡은 잘 몰라 그냥 패쓰한다.

찰스 쾅의 <페스티나 렌테 질여풍, 서여림>, 연주 시간 6분. 한국 초연이란다. 찰스 쾅은 우리나라로 치면 정재일 쯤 된다는 A님의 전언이다. 들어봤는데, 역시 내 취향이 아니다. 난해하다. Y님은 영화음악 같다는데, A님이 와호장룡과 영웅 얘기하니 얼추 장면이 떠오른다. 질여풍, 서여림이 이 곡의 주제라고. 바람과 고요함을 음악으로 나타냈다고 하는데, 역시 내 취양이 아니라 패쑤. 별 감흥이 없었다.



드디어 차이콥스키 음악이다. 선우예권 피아니스트가 등장하고 협주곡 1번이 시작됐다. 연주 시간 32분. 너무도 익숙한 초반부. 매우 좋아하는 곡이다. 오케스트라로 들으니 더 좋은 듯. 근데 협주곡 1번을 다 듣고 나니 협주곡 1번은 장대한 초반부가 제일 좋다. 물론 피아노 솔로와 오케스트라가 마치 대화하듯 또는 경쟁하듯 경연을 펼치는 부분은 화려하다. 선우예권의 손이 안 보일 정도의 섬세한 기교와 열정이 넘치는 연주는 정말 빼어나다. 막귀가 들어도 세계 콩쿠르 1위를 휩쓴 실력자인 듯, 그의 연주는 거침이 없다. 허나 역시 내 취향이 아니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차이코프스키의 명성을 알리게 해 준 일종의 데뷔작이다. 차이코프스키는 곡을 탈고하자 이 초고를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헌정하기 위해 곡을 갖고 루빈스타인 집에 갔는데, 루빈스타인은 곡을 치고 난 후 도처의 결점을 지적하며 혹평을 가했다고 한다. 
앞에서 내 취향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피아노 독주 부분의 선율이 초반의 선율과 비교해 매우 비정형적이라고 느껴서였다. 루빈스타인이 초고를 치면서 결점을 지적한 부분은 아마도 고전적인 정형성을 벗어나 익숙하지 않은 곡의 전개여서 결점을 지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교적인 면이 뛰어난 피아노 독주 부분은 개인적으로 난해함을 느꼈다.

협주곡 1번이 끝나고 선우예권이 슈베르트 곡을 앵콜로 들려줬다. 잔잔하며 듣기 좋은 곡. 앵콜까지, 멋진 녀석이다. 중간 휴식 20분이 주어졌고,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교향곡 제5번이 시작됐다. 연주시간 44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교향곡은 완전 내 취향을 저격한 곡이다. 44분이 4분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독일 고딕메탈 그룹 라크리모사의 팬이다. 지금도 여전히 내 핸펀 음악 앨범에 라크리모사 애창곡이 5곡 들어있고 일주일에 서너 번은 듣고 있다.

라크리모사 뿐만 아니라 고딕메탈의 정형적 특징 중 하나가 다크하고 비장미가 다분하다는 거. 그래서 1악장의 다크하고 비장한 선율이 그대로 꽂혔다. 그리고 비장미가 서서히 걷히면서 1악장 후반부가 밝고 찬란하게 마무리된다. 이 구성이 좋았다. 마찬가지로 2악장 초반부에 시작되는 호른과 오보에의 선율은 비통함을 어루만지듯 애틋하여 계속 듣고 싶게 하는 마력을 보여준다. 이 호른 선율은 1악장의 초반부의 비장함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좀 더 가볍고 활기차게 마무리된다. 1악장의 구성과 흡사하면서도 변주되는 2악장 구성이 돋보였다. 

3악장은 이제 초반의 비장미와 애수어린 선율에서 벗어나 미뉴에트 풍으로 전개된다. 오보에의 선율로 시작되는 경쾌하고(앞 부분에 비해) 우아한 선율은 4악장의 피낼래를 위한 전주 역할을 하는 느낌이다. 이어지는 4악장은 1악장에 나왔던 주요 악상이 변주하며 장엄하게 나타나는데 진짜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관악기가 사정 없이 내뿜는 기운은 아드레날린을 폭주하게 하며 환희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휘몰아치는 선율과 화음에 아타락시아의 경지를 맛 본 느낌.

특히 4악장에 나오는 익숙한 선율! 저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멜로디. 어디서 많이 듣던 곡이라 생각했는데 바로 오래 전 민해경이 부른 <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였다. 한국의 작곡가가 이 교향곡 5번 4악장에 영감을 얻어 편곡한 곡이라 한다. 몰랐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을 듣고 있었던 거.

어쨌거나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은 내 최애 클래식 곡이 됐다. 폭발할 때 폭발하고 절제할 때 절제하는 강 약의 절묘한 드라마틱한 구성은 정말 딱 내 취향이다. 다른 연주자가 지휘한 5번을 여러 개 들어볼 요량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콘서트 홀에서 직관한 감동만큼은 느낄 수 없겠지. 여러모로 좋은 감상이었다. 막귀가 정말 귀 호강한 날이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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