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에서 한 지인이 그랬다. 자기는 우울증이 있어 상담 치료를 받고 있다고. 다른 건 다 호전 됐는데 한 가지가 떨어지지 않는단다. 그래서 우리가 물었다. 그게 뭐냐고. 그랬더니 자살률이 98%가 나온 이후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나. 항상 언제 죽을지만 생각한단다.
매우 쾌활하고 생활에 여유도 있어 근심 걱정 없는 분인 줄 알았는데 그런 내막이 있는 줄은 몰랐다. 본인이 그랬다. 그렇게 우울증이 걸린 게 자기 어머니 때문이라고. 치매 말기라 자기가 어찌해야 좋을지 매일 번아웃과 같은 증상이 쌓여 지금의 상태가 됐다는 전언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만고불변의 진리다. 다만 그 시기만 문제가 될 뿐. 어떤 사람은 100세까지 장수를 누리다가 편안하게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갖은 병치례를 하며 80세에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 요즘은 치매로 요양원에서 죽는 비율이 점점 높아진다고.
기분 처지게 왜 죽는 얘기로 시작하는가 하니, 본 책 <에브리맨>(문학동네, 2012)이 ‘늙어감’과 ‘죽음’에 대해 얘기해 주기 때문이다. 사전 정보 없이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본 책이 죽음에 관계된 책이라는 걸 책을 덮고 나서야 알게 된다.
보통 이런 우울한 책은 읽는 게 힘들어 선뜻 손에 잡기 어렵다. 다른 재미있는 소설도 많은데 굳이 죽음에 관한 책을 읽는다니, 내키지 않는 분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책 타이틀로부터 이를 감지하기는 쉽지 않다. 필립 로스라는 브랜드는 일단 믿고 보는 저자다.
그렇기에 읽어 가며 약간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자꾸 무덤과 장례식 장면이 나오기 때문. 처음 시작부터 주인공의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게 텀을 두고 반복된다. 책을 다 읽으면 그 이유가 선명하게 보인다. 본 작품의 주제가 ‘늙어감’과 ‘죽음’이기 때문이다.
책의 타이틀이자 본문에 등장하는 ‘에브리맨’은 중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석 상점의 간판 이름이자 모든 보통 사람을 상징하는 단어이기에. 이 소설의 이야기는 곧 주인공의 일대기나 다름없다.
그래서 필립 로스는 주인공 캐릭터에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라는 3인칭 대명사만을 고수한다. 그 이유가 모든 보통 사람의 삶을 소설 주인공의 삶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설을 읽는 사람은 누구든 주인공의 비애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태어나서 유아기-유년기-청소년기-청년의 시기를 거쳐 중년 그리고 노년의 삶으로 이어지는 보통 사람의 시간 속에서 통상적으로 겪는 삶의 경험은 보편성을 담보한다. 소설의 주인공이 3번 결혼하는 예외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 속에서 겪는 인간의 고뇌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는 거.
그것이 바로 ‘생로병사’로 요약된다. 태어나서 죽되 그 과정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이 거세되면서 육체가 점점 시들어 간다는 점. 그에 수반되는 질병은 인간의 ‘생의 의지’를 갉아 먹는다. 결국 노인은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이제는 수많은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점점 줄어드는 과정에 있었으며, 종말이 올 때까지 남아 있는 목적 없는 나날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목적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과 말기에 이른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이거야 미리 알 도리가 없지.”(P167)
이렇게 말하는 주인공은 키가 190의 장신에 좋은 마스크를 갖고 있고 광고계에서 나름 유력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많은 돈과 출중한 외모는 그 어떤 여자도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는 연애 시장의 포식자다. 그렇기에 그의 신체가 시드는 것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상실감과 우울감을 갖게 한다.
필립 로스는 주인공을 대신해서 말한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P162) 그래서 이 한 문장은 너무도 강력하다. 이 책의 주제를 집약한 언명이자 우리 시대 모든 노인들을 대변하는 말이다.
주인공은 부모의 무덤 앞에서 외친다. 그의 어머니는 여든에 죽었고, 아버지는 아흔에 죽었다. 그는 소리내어 말했다. “저는 일흔 하나에요. 당신네 아들이 일흔하나라고요.” 그리고 주인공은 그 다음 날 심장 수술을 받다가 심장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여 심정지로 생을 마감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노년의 삶에 대해서 다시금 깊게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다가올 나의 미래. 그것은 필립 로스가 주인공을 대신에서 말했던 대학살의 시기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죽음만을 기다리는 고독하고 수동적인 삶. 가족이 없다면 학살의 칼을 온 몸으로 받아야겠지.
소설 속 주인공은 순환기에 이상이 있어 60이 넘어 매년 수술대에 올랐지만, 나는 어떨까. 치매로 기억이 없어지며 벽에 똥칠하다가 고독사하는 건 아닐까. 차라리 71세에 나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게 나을까. 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나는 분명히 혼자일 터인데 누가 나를 돌보며 누가 나의 시신을 거둘까.
이따위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1인 가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나와 같은 이 빌어먹을 망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걸 의미하겠지. ‘대학살기(大虐殺期)’가 오고 있다(왕좌의 게임 ‘Winter is coming’의 바로 그 버전). 소설을 읽고 어떻게 될지 미리 알긴 하지만, 이건 도저히 피할 수가 없을 듯하다.
인간은 모두 늙어 죽는다는 이 평이한 명제가 학살 당하기 위해 시나브로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이라니, 정말 무시무시한 소설이라 아니할 수 없구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