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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129님의 서재
  • 나는 바다를 닮아서
  • 반수연
  • 13,500원 (10%750)
  • 2022-12-05
  • : 377
반수연의 <나는 바다를 닮아서>를 읽고

북토크에서도 밝혔듯이 이 자신만만하고도 서정적인 책 제목은 작가가 정한 것이 아니다. 편집자가 글을 읽는 내내 파도 소리가 들려서 제안한 제목이라고 한다. 작가 자신도 부끄러워 하면서 감히 내가 바다를 닮았다고 했겠냐 그러니 바다를 닮고 싶어서로 번역해주면 좋겠다는 의미의 설명을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글을 쓰고 싶어 했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 글이든 붙잡히는 대로 읽던 버릇이나 작가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글들을 유심히 읽고 기억한 이유를 설명하긴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나에게 그런 욕망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다니던 대학원을 자퇴하고 취직을 하려 할 때 적어도 기사를 쓰는 일로 돈을 번다면 지겨워서 그만두진 않겠다고 생각해 언론사 시험을 봤고 나에게 글쓰기 욕망이란 딱 그 정도라고 생각했다.

어려서 읽은 어떤 평론가의 말 중에 “대학을 나오고 학위를 받고 유학을 다녀온 평론가가 아무리 애를 써도 국민학교가 학력의 전부인 작가가 쓰는 글은 쓸 수가 없다. 작가는 그런 사람들이다“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확실치 않은데 고 김현 선생님의 말씀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 글을 읽고 작가들은 왕후장상의 씨처럼 타고난 사람들이라는 나의 생각을 더욱 굳혔던 것 같다.

언론사에 들어가 잡지 기자가 된 나는 가끔만 열심히 일하는 게으른 직장인이었다(실제는 꺼벅하면 날밤을 샜지만) 인터뷰를 하고 제품 설명을 하고 가끔 각잡고 써야할 글이 있었지만 나는 자꾸 허기가 져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자꾸 공부가 하고 싶었고 동시에 집에 있는 아이가 애닳아서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았다. 나는 흩어지고 이해불가한 영혼인가? 평범하고 재테크로 돈을 불리거나 요리나 꽃꽂이를 배우는 청소 잘하는 부인을 원하는 남편과는 점점 대화가 어려웠다. 나는 별종이고 나도 날 잘 설명하기 힘들었으니까. 내가 하고 싶어하는 걸 하고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저 박완서가 아일 키우면서 글을 썼다거나 하는 거장의 전설만 읽어야 했다.

<나는 바다를 닮아서>는 자기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힘겨워서 강물 같은 한탄과 자식을 내세운 과도한 대리 만족으로 흘러가기 딱 좋았을 어떤 거대한 삶을 살아낸 작가의 이야기다. 처음 그녀가 소설집을 낸다고 페북에서 표지 제안을 했을 때 나는 감히 수없이 읽었던 주부들, 그 중에서도 해외에 거주하는 분들의 고만고만한 소시민적 소설들을 떠올렸다. 난 아무 거나 잡히는 대로 읽은 사람이고 아버지에게 잘 보이려는(문학 전공은 아니시지만 문학 관련한 유명한 책도 쓰셨다) 수많은 작가들의 첫 소설집도 수없이 읽어봤기 때문이다. 나는 만나보면 공감적이지만 거리가 있을 땐 냉정하다. 큰 기대가 없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는 깜짝 놀랐다. 그림을 잘 그리긴 어렵지만 잘 그린 건 금방 알 수 있다. 글도 그렇다. 놀라운 건 그녀의 글은 하나 같이 자기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자신을 글쓰기에 녹여내는 건 정말 힘들고 아프고 또 어렵다. 그리고 한두 편에 털어놓고는 자기의 좁은 밑바닥이 드러나면 실제 경험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게 보인다. 사실 작가는 그게 시작이고 끝인 것도 같다.

<나는 바다를 닮아서>는 어쩌면 자신의 소설적 자원의 원천이기도 한 자기 이야기를 아무 가림막도 없이 풀어낸 글이다. 도대체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작가는 어떤 삶의 비밀이 있길래 하고 들어다 보았다가 그 삶 앞에서 우리는 같이 울고 공감하게 된다. 결국에는 그녀가 가진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삶을 통해 체득해낸 태도와 이해의 방식을 나의 것과 나란히 세우면서 안심하기도 하고 힘껏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글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통영에서 선술집을 하던 시절 이야기다. 엄마가 취객으로부터 맞는 걸 이층의 창문으로 보면서 분노와 두려움에 차 검은 창 너머에서 소리 지르던 아이의 장면. 포목상, 과일상 아이들의 무시와 혐오에 대항할 수 없었던 어린 수연이 자기 보다 못한 떡볶이 포장마차집 아이에게 “집도 가난한 게”라는 발언을 한 이야기다. 우리는 저항할 수 없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것이 자기상에 관한 것일 경우 더욱 그렇다. 약한 자들에게 찌그러진 자아상을 펴볼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그러니 더 약한 자를 만날 때 구겨놓았던 분노의 스프링이 튀어오르게 되어있다. 그날 울며 가던 떡볶이집 아이는 엄마를 대동하고 수연의 집을 찾았고 언니에게 플라스틱 바가지가 깨지도록 머리를 맞는 게 후련했다. 나는 이 장면을 읽고 지하철을 갈아타는 긴 출근길 내내 나의 경험들을 떠올렸다. 우리는 모두 부끄러운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치졸한 내 행동 역시 약자의 위계 안에서 무사유적인 이동일 뿐이라는 인식을 하려면 우선 그걸 고백하고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부끄럽고 아픈가. 이제 힘이 생긴 내가 들추어내지만 않아도 나는 매끈하고 근사하게 살 수 있다. 그리고 어두운 창문 뒤의 나는 약하고 선한 모노톤의 필터로 잡티 없이 뽀샵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힘은 친절한 이웃을 못난 마약쟁이로 끝까지 의심했던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에서 나타난다. 그녀가 글을 잘 쓴다고 말할 때 나는 그녀의 이런 자기 개방과 수치감내력(내가 만든 말이다 좌절감내력처럼!)에 감탄하는 것이다.

아마 작가란 내면에서 분리되는 자신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한 명 한 명 들여다 보고 그 얘기를 받아 적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글을 읽는 내내 들리던 파도 소리는 부끄러움과 자기 수용이 반복되는 바다와 같은 마음의 음향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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