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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고양이의 숲
  • 금지된 일기장
  • 알바 데 세스페데스
  • 16,200원 (10%900)
  • 2025-01-06
  • : 13,920

일기를 쓴다는 건 내밀한 속내를 쓴다는 것.

하지만 과연 일기는,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발견될 가능성을 두려워하면서 쓴 일기에,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는 밑바닥이란 어디까지 일까?


때때로 일기를 쓰곤 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제법 솔직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누군가에 대해서나 시시콜콜한 잡담도 있었지만 부당해 보이는 사건과 대상(부모님을 포함해서)에 대한 불만 토로와 산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조금은 있었다. 부모님이 내 일기를 발견할까봐 두려웠던 기억은 별로 없다. 직접 말하기 힘든 불만을 간접적으로 알아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던 것일까. 부모보다 또래관계가 더 중요할 때라 그랬던가. 친구가 일기를 보는 쪽이 더 곤란했을 것 같긴 하다. 


그러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 쓰는 일기는 어딘가 공식적인 데가 있다. 일기가 어떻게 공식적일 수 있는가? 하지만 남편이나 아이들이 볼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강하게 가진 상태에서 진짜 내밀한 일기라는 게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사회적 평판이 중요하다면, 일기장을 폐기하기 전 갑작스럽게 사망할 일이 걱정될 수도 있다. 온라인 일기도 마찬가지다. 

왜 가족이 일기를 보면 곤란한가? 가족 험담이라도 썼나, 아니면 바람이라도 폈나? 그런 문제가 아니다. 독립적인 여러 인격체가 함께 살아가며 겉으로나마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고, 욕구를 다 드러내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깊이 파고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면을 박박 파고 들어간 일기는, 그 평온함을 순식간에 깨뜨릴 수 있다. 더구나 가족 중에 가장 많은 것을 참고 숨겨온 존재(아내,어머니)의 일기가 공개된다면? 그 결과는 파국이 아닐까?


여기, 1950년 이탈리아에 발레리아라는 여성이 있다. 

귀족 가문의 어머니와 변호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발레리아는 일찌감치 변호사 남편 미켈레와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아 키웠다. 첫째 리카르도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고 둘째 미렐라도 대학에 들어가 이제 곧 성인이 될 것이다. 전후의 이탈리아, 경제적 어려움으로 8년 전부터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그녀는 현재 43살. 아직 젊은 나이지만 남편도 아이들도 그녀 자신도 스스로를 할머니처럼 여기고 있다.


그런 발레리아가 어느 날, 이상한 충동에 이끌려 담배를 사러 간 가게에서 일기장을 사들고 온다. 가게 주인은 "금지된 일"이라며 일기장을 건네는데,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주말에는 담배 가게에서는 담배 외의 물건을 팔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발레리아에게 일기를 쓰는 일은 그야말로 '금지된 일'처럼 여겨져서, 그날부터 그녀는 누군가 일기장을 발견할까 전전긍긍 하며 여기저기 숨겨 놓고 혼자 있을 시간만 기다리다 다급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 책 자체가 발레리아의 일기장이다.


나는 그녀가 그토록 불안해 하며 쓴 일기에는 스스로 가한 검열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이런 부분을 보라. 자신이 상처받았던 일화를 적으면서 쓴 글인데도 '신경이 예민했던 나는', '나를 다정하게 껴안으며 위로해주었다'라면서 남편을 변호하고 있지 않은가.


미켈레는 언제나 거실에서 혼자 신문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를 재우고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나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기다리느라 거실로 나왔을 때는 어두워진 후였고, 나는 지치고 졸린 상태에서 미켈레에게 비난을 듣자 상처를 받았다. 당시 신경이 예민했던 나는, 그의 자식을 돌보는 것도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라면서 격하게 화를 냈다. 미켈레는 내가 틀렸다고,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자기는 인생의 동반자와 결혼했지 베이비시터랑 결혼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말에 마음이 상해 나는 울음을 터뜨렸고,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미켈레는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다정하게 껴안으며 위로해주었다.  - 283쪽 



들킬 것을 두려워하면서 가족들에게 신경질적으로 굴면서, 그러면서도 그녀는 일기 쓰기를 놓지 못한다. 그녀는 일기 쓰기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음을 인정한다("이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왠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두렵다.",51쪽). 망각 속에 모든 걸 흘려보내면 더 평온했을 텐데, 모든 일을 곱씹어 깊이 생각하여 일기장에 적다 보면 보이지 않았거나 보아도 모른 체 했던 것들이 보이게 마련. 어느 순간부터 남편이 그녀를 '엄마'라고 장난스레 부르던 것이 거슬리고, 안쓰럽게만 여겼던 리카르도의 못난 점이나 보수적인 과거의 성역할 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미렐라의 모습이 분명히 보이며, 할머니라 여겼던 자신의 욕망을 깨닫는다. 


발레리아는 자신이 과거와 미래 사이, 어머니 세대와 딸 세대 사이 교두보가 되었다고 느낀다. 그녀는 직장을 다니며 인정받는 자기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은 여자가 일하지 않는다'는 전통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한다. 일하고 퇴근하여 가사일을 모두 도맡는 일상에 피로와 분노를 느끼면서도 그렇게 부담을 짊어지는 자신의 모습이야말로 가족들로 하여금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겨 포기하지 못한다("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하거나 기분 전환할 만한 일을 하면 1분 1초도 빠짐없이 가족을 위해 바친다는 나의 명성에 누가 될 것만 같았다.", 36쪽). 그렇게 과거의 관습과 관념이 격변하는 세상에서 발레리아가 느끼는 혼란과 모순이 일기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950년 이탈리아, 나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사람이 쓴 일기에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그때나 지금이나, 가부장제 하의 여성에게는 내면의 진입 장벽이 있다고 느낀다. (아마도)아무도 보지 않을 일기를 쓰면서도 자기 검열을 거치고, 관습에서 벗어나는 행동에 큰 혼란을 느낀다. 자신의 욕구를 솔직하게 인정하기 어렵고, 드러낼 경우 비웃음이 두려우며("내가 일기를 쓸 수도 있잖아"라는 말을 했던 발레리아에게 남편과 아들딸 모두가 웃으면서 "대체 뭘 쓸 거냐"고 묻는다), 욕구를 인정하는 순간 더이상 참을 수 없는 현실의 부당함에 괴로워질 것이다. "넘칠 것 같은 내면의 강물을 마음껏 흐르게 하려고"(419쪽) 일기를 쓰기 시작한 발레리아가, 이 벽에 부딪히는 과정이 실감나고 마음 아프게 그려진다. 


이탈리아에서 거의 잊혀졌던 이 작품이 다시 읽히게 된 게 엘레나 페란테 덕분이라고 한다. <나의 눈부신 친구> 로 유명한 페란테가 이 작품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는 것. 금지된 일기장 한권쯤 마음에(또는 현실에) 품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흠뻑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 돌아와 중절모와 변호사 가방을 내려놓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성공하지 못해서 우리가 부자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돈보다 훨씬 가치 있는 자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부모님이 몸소 보여주었던 삶의 모델, 우리에게 자연스런 영감을 주고 우리를 이끌어주었던 삶의 모델이 항상 명확하고 흔들림 없이 확고한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 그럼에도 나는 과거의 신념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나는 남편에게 언제부턴가 미렐라와 리카르도가 우리를 못 미더워하게 된 것은 이러한 우리의 의구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P34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하거나 기분 전환할 만한 일을 하면 1분 1초도 빠짐없이 가족을 위해 바친다는 나의 명성에 누가 될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하면 가족들은 직장에서 일하고, 부엌에서 요리하고, 시장에서 장을 보고, 집에서 옷을 수선하면서 보낸 수많은 시간은 다 잊고, 독서나 산책을 하면서 보낸 얼마 안 되는 순간만을 기억할 것이다.
미켈레는 내개 언제나 잠시라도 좋으니 좀 쉬라고 하고 리카르도는 직장을 구하면 제일 먼저 나를 카프리나 리비에라 같은 휴양지로 보내줄 것이라고 한다. 내 노고를 인정하는 순간 자기들은 모든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족들은 허구한 날 심각한 표정으로 그만 일하고 좀 쉬라고 한다. 마치 내가 변덕스러워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작 어쩌다 한번 신문이라도 읽을 마음으로 가족들 사이에 자리를 잡으면 "엄마, 할 일 없으면 재킷 안감이나 좀 수선해주세요."라거나 "제 바지 좀 다려주세요"라고 부탁하곤 했다- P36
저녁에 침대에 눕는 순간 밀려오는 피로감이 평안의 원천이다. 어쩌면 휴식을 거부하는 나의 굳은 의지는 피곤이라는 행복의 원천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P38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일기장의 존재가 느껴진다. 하루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항상 나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빼고는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사소한 말투나 단어 선택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만큼,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왠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두렵다. - P51
그날 밤 우리는 오랜 대화 끝에 모녀가 아니라 원수처럼 헤어졌다. 굳이 글로 남기지 않았더라면 대화 내용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과거에 한 말이나 한 일을 잊는 경향이 있다. 그 말을 지켜야 하는 끔찍한 의무감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망각하지 않으면 인간은 죄다 오점투성이의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하겠다고 약속했던 일과 실제로 한 일, 되고 싶었던 존재와 현실과 타협한 실제 모습과의 간극이 큰 모순덩어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 P71
그날 저녁 일기장을 평소보다 더 신중하게 숨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의자 위로 올라가 일기장을 침대 시트와 수건을 보관하는 수납장 위에 올려놓았다. 일기장을 숨기면 20년 동안이나 내 딸에게 밥을 해먹이고, 가르치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 그 아이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신중히 살폈음에도 불구하고 그애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P71
가족들은 이 시간에 모두 잠을 잔다. 수면은 전날의 무게를 느끼지 않고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지난 하루 동안 겪은 모든 일을 지워버린다. 하지만 나는 탕감받지 못한 빚을 기록하는 장부처럼 어제의 일을 일기장에 보관하고 있다.- P406
하지만 그보다는 포기야말로 그애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더 자주 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늘뿐 아니라 영원히 마리나를 굴복시키고, 그애에게 나의 삶처럼 탈출구가 없는 삶을 동경하며 살아야 하는 벌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P407
평생 내 모든 것을 가족에게 다 주었는데도 아직도 뭔가를 주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간절히 기다린다. 글을 쓰기 위해서. 젖이 너무 많아서 아픈 가슴처럼 넘칠 것 같은 내면의 강물을 마음껏 흐르게 하려고, 그러기 위해 이 공책을 산 것이다.-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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