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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은 박물관
  • 오야마 세이이치로
  • 15,210원 (10%840)
  • 2023-09-20
  • : 3,030

데라다 사토시는 수사 중 중대한 실수를 저질러 범죄 자료관으로 좌천된다. ‘붉은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그곳은 런던 광역 경찰청 범죄 박물관인 검은 박물관을 흉내 내어 설립하였지만 실제로는 증거품과 수사 서류 보관고에 지나지 않는 한직이다. 형사를 천직으로 생각해온 사토시로서는 굴욕적인 처분이다. 관원이라고는 관장과 조수 둘뿐. 심지어 관장이라는 사람은 차갑고 기계적이며 의도를 알 수 없는 지시를 내린다.



잘나가던 한 사람이 모종의 실수로 좌천되고, 시시하다 여겨지던 보직에서 뜻밖의 고수를 만나 성장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그리 새롭지 않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어느 퀴즈 게임의 도입부였을 경우 우리는 보다 더 가벼운 마음으로 게임에 돌입할 수 있게 된다. 긴장을 풀기 위한 준비 게임처럼 말이다. 데라다 사토시는 어떤 실수를 저질렀기에 창고로 옮겨갔을까? 관장인 히이로 사에코의 정체는 뭘까? 오야마 세이이치로의 『붉은 박물관』은 이처럼 가벼운 질문으로 미스터리의 포문을 연다. 본격적인 두뇌 싸움에 앞서 서로에게 익숙한 무대 장치를 보여주며 유대감을 먼저 쌓는 느낌이다.


책 속에는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이야기마다 사건의 내용이 다르며, 그 흐름은 사토시가 붉은 박물관에서 근무한 기간의 수평선에 놓여있다. 우연히 목격한 교통사고의 부상자가 교환 살인을 저질렀다고 고백한 뒤 숨을 거둔다거나 26년 전과 똑같은 범죄 현장이 재연되는 등 당혹스러운 질문이 지속적으로 던져진다. 그때마다 사토시는 본인의 탁월한 수사 능력을 바탕으로 사에코의 뜬금없는 지시 사항을 완수하며 사건의 단서를 모은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사에코가 사토시에게 왜 그런 일을 시켰는지를 추리하게 되고, 추리가 진지해질수록 사에코와 전적으로 겨루고 있는 듯한 기분에 빠진다. 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읽는 즐거움이 여기에 있다. 이제 됐어, 그 사람을 불러줘, 하고 사에코가 말할 때 내가 먼저 추리 내용을 말해버리는 얌체 같은 조급함. 사에코의 추리와 얼마나 일치했고, 달랐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희비.


수사 능력은 뛰어지만 수사 경험은 전무한 사에코와 탐문 수사가 특기인 전 수사 1과 형사 사토시의 조합은 탁월하다. 사토시가 자신의 상사를 미심쩍게 바라보고, 미묘한 경쟁심을 품으며 언젠가는 수사 1과로 복귀하겠다는 야심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그리고 그는 나날이 사에코의 조수 역할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형사로서 그가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지속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관장인 사에코는 온종일 수사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토시에게 주기적으로 ‘재수사’를 명령한다. 창고, 한직 등으로 불명예스러운 자리처럼 여겨지던 조직의 진가가 발휘되는 건 그때이다.



나는 이 ‘붉은 박물관’이 법망을 피해 도망치는 범인을 막아내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궁에 빠진 사건의 증거품이 여기 오면 나는 그 사건을 한 번 더 검토하지. 물론 검토해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아. 그러나 아주 드물게도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어. 그런 관점을 바탕으로 사건을 바라보면 해결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거야.


오야마 세이이치로 「빵의 몸값」 중


붉은 박물관으로 옮겨지는 사건들은 대부분 시효가 만료된 것들이다. 범인을 밝혀내봤자 형사처벌을 할 수 없는 범죄들이기에 차순위로 밀려나거나 방치되거나 쉽게 잊히는 범죄들. 밤낮으로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는 사에코의 존재는 그런 의미에서 안심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간에 한 사람 정도는 끝까지 붙들고 있다는 걸 알게 하니까. 사에코의 재수사 명령이 반가운 건 사토시만이 아닐 것이다. 인간미 없는 사에코가 깔아주는 판 위에서 우리는 인간성을 돌아볼 기회와 사건의 진실, 두뇌 싸움의 즐거움을 모두 얻는다.


오야마 세이이치로의 작품들은 추리하는 재미만큼 해결 후의 여운이 길다는 특징이 있다. 보통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면 작품의 흥미도도 뚝 떨어지게 마련인데,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달랐다. 뒤늦게 몰려오는 감정들이 강했다. 사건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거나, 어처구니없어서. 과정이 너무 비극적이거나 안타까워서. 결말에 던지는 메시지가 너무 묵직하고 얼얼해서. 비교적 허술하다거나 식상하다고 느껴졌던 부분들도 금세 잊고, 작품 자체의 여운만 남았다. 돌아보면 즐겁게 책을 읽던 나와 책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여러 감정을 손에 쥐여주던 인물들뿐이다.



※ 본 글은 리드비로부터 도서와 소정의 원고료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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