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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처럼
  • 조선의 싱어송라이터
  • 이미경
  • 17,820원 (10%990)
  • 2026-03-09
  • : 430

『조선의 싱어송라이터』를 읽고

 

어떤 노래는 끝난 뒤에 시작된다.

멜로디가 멎고 나서야 비로소 문장이 또렷해지는 순간이 있다. 이 책은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노래를 듣는 대신 읽는다. 읽히는 노랫말은 더 이상 유행이 아니라, 시간의 흔적이 된다.

책을 펼치면 먼저 산수화 한 점이 놓여 있다. 굽이치는 산길과 정자, 그리고 그 길을 오르는 작은 인물. 사람은 작고 풍경은 넓다. 사랑을 개인의 사건으로 믿어왔던 마음이 그 앞에서 잠시 물러선다. 사랑은 늘 시대의 지형 위에 놓여 있었을지 모른다. 오르는 길은 각자의 몫이지만, 산은 공유된다.

고전 시가와 현대 가요를 엮는 접근이 나는 새로웠고 오 흥미롭네 하며 호기심이 일었다.

사람과 사람사이 일이 다 그렇지. 시대가 변한 들 어디 사랑이 변하랴. 사람이 변하지.

목차를 보니 사랑시인가 싶을 만큼 소 제목들이 감성적이다.

예를 들면 그대에게 내 마음을 고이 띄워 보냅니다.

아, 그 지긋지긋한 사랑을 또 이렇게 예쁘게 표현했네 싶을 만큼 샘이 난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누었는데 1부는 사랑으로 시작한다.

 

첫 시작은 서경별곡과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어릴 때 외기 싫던 서경이 아즐가~ 위두어렁셩 두어렁셩~.

그런데 언제나 다가오는 부두의 이별이 ~는 얼마나 쉽던가.

13페이지 위에

사랑하신다면 울면서라도 쫓으리이다.라는 제목에 쿵,

하많은 세울 울었었지. 지금이라면 정신차리래이, 다 소용없다, 나라면 이럴텐데 작가님은 이렇게 애절하게 사랑이야길 푸신다.

여기에 역사와 지리학적 이야기도 나온다. 고려시대 평양은 서경이었고, 해상무역에서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고 있다. 이에 묘청의 난까지 언급. 이 책이 역사책이야? 국어책이야? 사회책이야? 아니 사랑시집? 읽으며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려운 고려시가를 이렇게 쉽게 푸시다니.

나도 학교다닐 때 고전시가가 어려웠다. 무슨 말인지 재미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내가 고전시가를 배울 때 이 책이 나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책이다.

그런데 정선의 연광정이란 그림이 등장한다. 아니 그림까지 넣다니. 저절로 옛 시간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그림만 찾아보다가 또 깜짝 놀랐다. 어쩜 이리 구하기 힘든 그림들을 착착 골라 넣었을까? 그림이 시고 시가 영화고 노래가 되어 귀에 착착 들린다.


다시 나타난 시가 장석남 시인의 <배를 밀며>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갑자기 옛 이별이 떠올라 울컥했다. 마음에서 지워버린 시를 다시금 써 볼까 싶기 까지 했다.

 

마음을 푹 젖게 해 놓고는 말릴 틈을 안 준다.

대동강 물이 마를 날이 있을까?

정지상의 송인, 이라는 한시와 김민기의 친구를 이야기 하는데 대동강 아니라 동네 호수공원 물도 마를 수 없겠네 싶다.

읽다가 나오는 시들만 필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명원의 별리

 

깊은 밤 창밖에 보슬비 내리고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

나는 정 아직 부족한데 날이 새려 하니

비단 옷깃 부여잡고 뒷날을 기약하네.

 

왜이리 아름다운지 내가 곧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어 안달복달이다.

 

 

난 파도가 밀면

노래 위에 적힌 글씨처럼

그대가 멀리 사라져버린 것 같아

늘 그리워 그리워

(…)

이 밤 그날의 반딧불을

당신의 창 가까이 띄워요

 

파도는 밀리고, 글씨는 번진다. 사랑은 또렷하게 적혔다고 믿는 순간 가장 쉽게 흐려진다. 그러나 “늘 그리워 그리워”라는 반복은 지워지지 않는다. 반복은 과장이 아니라 버팀이다. 바닷물을 창가에 띄운다는 상상은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보내는 마음의 형식이다. 닿지 않음이 오히려 사랑을 또렷하게 만든다.

가장 내 맘 같았던 건 탑처럼 쌓아올린 36행 보탑시.

이별, 그리움, 가야할 길은 멀고, 소식 전할 글월은 더디기만 하오.

 

책을 읽다보면 감탄을 멈출 틈이 없다. 아이유, 장기하와 얼굴들, 이효리, 임영웅까지 나오고, 다시 읽을수록, 아 이 맘이 이리 애절하네 싶은 시들, 노래 가사들. 정말 한류가 그냥 한류가 된 게 아니네 싶었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사랑은 점점 줄어들고, 대신 태도가 남는다. 그리고 한 편지의 문장이 등장한다.

 

“오늘 집에서 보낸 서신과 선물을 받았소.”

“당신이 곱게 보내 바느질한 옷은 입을 수 없을 것 같소.”

 

“못내 아쉬워 집 안 뜰의 은행 아래 저를 두고…”

“동백이 붉게 타오르는 이유는 당신 눈자위처럼 붉기 때문이오.”

 

떠났다고 말하면서도 색을 남긴다. 단호함 뒤에 온기가 남는다. 사랑은 끝났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파도에 번진 글씨는 다른 자리에서 다시 붉어진다. 감정은 소멸하지 않고 형태를 바꾼다.

 

이 책은 노래를 통해 조선을 읽는다. 그러나 읽다 보면 조선이 아니라 사람이 남고 삶이 남고 태도가 남는다. 사랑을 어떻게 말했는가가 아니라, 사랑 이후에 어떻게 서 있었는가가 더 또렷해진다.

파도는 밀려가고,

달은 기울고,

꽃은 피었다가 스스로를 닫는다.

노래는 끝난다.

그러나 남는 것은 한 사람의 자세다.

『조선의 싱어송라이터』는 사랑보다 이별을 이야기하고 묻는다. 사랑이 지나간 뒤에도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는가. 그 질문이 이 책을 조용히 오래 읽히게 한다.

이 책은 곁에 두고 자주 아무 데나 펴고 읽다가 또 무심히 두고 가끔 건조해진 마음에 물 주듯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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