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흑산"이라는 함축적인 제목, 심플한 표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설이라는 것으로 쉽게 읽어야지, 하는 기분으로 샀던 책이다. 그런데 읽는 게 꽤나 힘들었다. 어디에서였을까. 문득 김훈 씨가 했던 "읽는 사람도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쉽게 읽힐 소설을 쓸 생각이 없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 때문이었을까.




책의 상당부분이 인물 소개다. 해당 인물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한 편의 글로 소개한다. 이 소설에는 정말 많은 인물이 나오는데 누구 하나 성한 인물이 없다. 출신은 좋았으나 천주교에 빠져 온전할 수 있었던 자신의 삶을 모조리 망가뜨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출신부터 뿌리를 알 수 없고 이곳 저곳 떠돌며 고생만 하다가 천주교에 빠져, 그걸 위로라고 삼는 사람도 있다. 참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천주교를 믿는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인물들이 천주교를 믿는 건 아니다. 이 소설에서는 천주교의 정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대비'다. 대비는 여러차례 자교를 내리면서 백성들을 천주교로부터 되돌리려 노력한다. 내 기억에 가장 뚜렷이 남는 자교는 첫 번째 자교였다. 이 자교의 앞부분은 자칫 잘못 읽으면 따스하기 그지없는 느낌을 준다. '제 자리'로 돌아가라. 내 노력해보마. 하지만 조금 무책임한 구석이 있다. 갑작스레 천주교를 '요설'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며 온갖 욕을 쏟아낸다. 그럴만도 하다. 대비는 그 사회의 '지도층'이었다. 그 사회가 변하는 것을 굳이 허락할 이유가 없다. 어떻게든 백성들을 어르고 달래서 '제 자리'로 돌려보내 그 사회를 유지하는 것, 대비는 바로 그걸 원했다.




하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상당수의 인물은 '제 자리'로 돌아갈 인물들이 아니다.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제 자리'를 거부한 이들이었다. '야수'가 부활하여 이 땅에 구원을 베풀 것이라 굳게 믿으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어쩌면 자신들의 지친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대비의 자교에도 불구하고 '제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어르고 달래'주지 않는 지도층에 대한 원망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제 자리'를 거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르고 달래주지 않는 이들에게 가해진 것은 무자비한 폭력과 잔인한 죽음이었다. '어르고 달래서' '제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이들에겐 '매가 약'이라는 식이었을까. 이들에겐 '제 자리'로 돌아가라는 명령 하에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하지만 막상 고문의 현장에서 이들이 진심으로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대수가 아니었다. 고문을 가한 이들에게, 아니, '제 자리'를 벗어난 이들에게 '제 자리'로 돌아오라, 명령했던 이들이 관심있었던 것은 '제 자리'를 이탈한 모든 자들을 베고, 찢는 일이었다. 고문을 받는 자가 '배교'라는 명분 하에 '제 자리'로 돌아왔음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동료의 정보를 발설하는 것이었음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순교'라는 이름으로, 그 땅에서 추방되었다.




이 소설에서 대다수 인물들은 '순교자'가 되었다. 이 상황을 잘못 생각하면 우리는 '배교자'에 대해 무자비한 비난을 쏟아내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박차돌'이라는 인물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이 소설에서 가장 대표적인 배교자다. 그는 동료의 정보를 발설하고 풀려난 것은 아니었지만 풀려난 이후 동료를 사냥하러 다닌다. 천주교를 믿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속속 캐내고, 그 사람들을 죽이는 칼을 가는 데에 일조하였다. 심지어 그 칼로 자신이 잃었던 여동생마저 베게 된다. 감옥에서 처참하게 죽은 여동생을 묻어주며 어차피 죽을 년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더 아픈 것은 그가 여동생을 두 번 죽인 일이다. 잃어버린 여동생의 모습을 아리에게서 발견하고서 뒤늦은 그리움을 어루만지던 그는 결국 아리마저도 체포하기에 이른다. 이 소설에서 박차돌은 결국 잠적하게 되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배교자'들을 읽어야 한다.




순교자와 배교자의 뿌리는 '교', 천주교라는 '악령'이다. '제 자리'를 거부한 이들이다. 순교자들은 죽음, 곧 이 세상을 버림으로써 '제 자리'를 거부했고, 배교자들은 무자비한 폭력 끝에 '제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박차돌의 잠적에서 보듯, '제 자리'로 돌아왔음이 마음마저 돌아온 건 아니다. 애초에 '제 자리'에 돌아왔음을 인정받는 기준이 그게 아니었다. 순교자들에 대한 배신이 그 대가였다. 어쩌면 더러운 그 대가를 지불하고 '제 자리'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제 자리'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돌아간 척, 그는 앞으로 살아갈 평생의 나날을 아픈 육체를 달래며, 상처받은 영혼을 달래며 지내야 할 것이었다.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은 그가 아니다.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은. 없다. 아무 것도.




엉뚱한 이야기지만 이 소설을 읽는 느낌은 자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차분하게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내가 읽은 어떤 소설은 탐욕적인 어느 인물들의 내면을 치열한 짐승들의 본능처럼 그렸고, 어떤 소설은 신나게 창검술을 중계하는 기분으로 그렸는데 이 소설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말처럼, 말이나 글로서 정의를 다투는 게 아니라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을 말하고 싶었던, 그런 그의 글이 새로운 삶을 증언하면서 죽임을 당한 자들과 돌아서 현세의 자리로 돌아온 자들 모두를 차분히 위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