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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상실의 시대' 를 읽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섬세하고 감수성 넘치는 초기 작품들을 좋아합니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를 읽으면서 그때의 느낌이 어렴풋이 떠올랐습니다.
조금은 충격이었고, 조금은 새롭고, 조금은 말캉말캉해진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ㅎㅎ
저자이신 최인호님은 암투병을 이겨내고 이 책을 집필하셨다고 합니다.
손톱이 하나, 발톱이 두개가 빠지는 고통을 느끼면서 '글을 쓰고 싶다! 글을 써야한다!' 는 일념으로 한자한자 적어내려가셨다고. 이런 '작가의말' 을 읽고 나서인지 왠지 경건해진 느낌으로 읽게되더라구요. 그리고 독자로서 저자의 집필 열정을 존중하기 위해 읽는 동안 호흡이 끊기지 않도록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한번에 읽었습니다.
저자가 암투병 중이라든지, 그로인해 심경에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는지를 배경으로 몰랐어도 이 소설은 작품 자체로 무척 좋았습니다. 엄청난 사건과 스팩타클한 이벤트가 발생하지는 않지만 뭔가 장엄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줄거리는 주인공 K의 평범한 일상 중 3일입니다.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처음엔 목차가 하도 간단해서 이러시려면 목차가 없어도 되겠네~ 하는 생각도 했어요.ㅋ
주인공 K 의 어느 평범한 토요일에서 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K에게는 반복되는 일상의 패턴이 있습니다. 7시에 일어나서 샤워를하고, 면도를하고, V브랜드의 스킨을 바르고, 커피를 마시고...
그런데 오늘은 참 이상한 토요일 입니다. 토요일에는 맞춰놓지 않는 자명종이 울렸고, 항상 사용하는 V브랜드의 스킨은 Y브랜드로 바뀌어있고, 아침을 준비하는 아내는 낯설기만 합니다. 낯익은 환경에서 벌어지는 낯설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혼란스러운 그의 3일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과연 이 작가가 왜 이렇게 인정받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의 단면들을 너무나 섬세하게 표현하고 계시다는 것이 놀라웠고, 단지 3일 뿐인 주인공의 삶을 표현하였지만 그 안에 깊고 넓은 시공간이 펼쳐진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각각의 다른 사건들이 함께 맞물려 돌아가는 모양도 자연스러웠구요.
'작가의 말' 에서 그는 또 이런 말도 남기셨는데,
"남에게 읽히기 위한 문학이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한, 나중에는 단 하나의 독자인 나마저도 사라져버리는 본지풍광(本地風光)과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창세기를 향해서 당당하고 씩씩하게 나아갈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나의 십자가인 원고지 위에 못 박고 스러지게 할 것임을 나는 굳게 믿는다."
그래서 인지 읽고 나니 어떤 부분에서는 종교적인 색채가 느껴지기도 했어요.
주인공 K의 어머니와 누이를 보면서, 예수님과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의 느낌도 느껴졌고, 주인공의 3일이라는 컨셉도 마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3일이 연상되는 것은 저만이 아니지 않을까... 한다는...
주구장장 시험과 수능으로 얼룩졌던 국어 교과서가 싫어서였나? 한국인임에도 한국 문학에는 별 관심이 없던 저 스스로가 조금 무책임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론 멋진 한국 작가들의 글빨에 더 자주 감동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