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신 판 세계문학의 숲 41
크누트 함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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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색해버린 사랑의 의미에 대하여.


할리우드 판 영화에서는 종종 진정한 사랑(True love)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을 묻는 영화들이 있다.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사랑해’라는 세 글자가 왜 이다지도 가벼워졌을까.


목신 판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자연에서 노니고 악기를 좋아했던, 숲과 들 그리고 양떼나 양치기들의 신이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밤길의 어둠과 적막이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이처럼 전조 증상이 없이 갑작스레 느끼게 되는 공포를 판 때문인 것으로 미루어 Panic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책의 표지는 노르웨이의 어느 자작나무 숲을 옮겨온 듯 평온하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주고, 그 사이를 자유롭게 노닐던 판의 모습이 어떻게 묘사될 것인지에 대한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목신 판>과 <빅토리아>라는 두 개의 소설을 한데 모아놓았다.


<목신 판>에서는 자연에서 수렵을 통해 생활하는 토마스 글린 중위가 등장한다. 그의 과거는 철저히 배제된 채, 회고록의 형식을 빌려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차분히 건네는 듯 진행된다. 어느 비 내리는 날 한 소녀를 만나 사랑이라는 감정을 마주하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과 점차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하게 되지만, 그마저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충동적인 인물이다.


한편, <빅토리아>에서는 두 남녀가 신분적 차이에 의하여 엇갈린 사랑을 하게 되는 상황이 그려진다. 요하네스는 물레방앗간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공주라고 여기는 성주의 딸 빅토리아에게 연모의 감정을 키우지만, 그녀는 정작 다른 이와 약혼을 한다. 뒤늦게 자신의 신분적 차이를 깨닫지만, 그럼에도 요하네스는 시인이 되어 생활한다.

 

사랑은 한 남자를 망칠 수도 있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고, 그에게 다시 낙인을 찍을 수도 있다. 사랑은 변덕스러워서,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내일 밤은 낯선 이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또 한편으로는 불변성을 갖고 있어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봉인처럼 굳게 지속될 수도 있고, 죽음의 순간까지 꺼지지 않고 타오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p.230)


두 소설 모두 남자가 주인공으로 서술되는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목신 판>에서 등장했던 글린이 <빅토리아>에 등장하고 있어, 이 두 소설을 잘 엮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이 두 소설과 크누트 함순에 대한 소개를 담은 번역가의 해설 부분을 통해 작가의 생애와 함께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굶주림>이라는 책을 알게 되어, 그를 몰랐던 나에게는 또 다른 책을 소개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일전에 북유럽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50개의 키워드를 읽는 북유럽 이야기(김민주 저)>라는 책을 읽었다. 그 책을 통해서도 북유럽에 대해 한발짝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핀란드 슬로우 라이프(나유리 외 공저)>라는 책을 통해 그들의 삶을 오롯이 동경해보았다.


이번에 만난 크누트 함순의 <목신 판>을 통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던 북유럽에 대한 이미지가 꼭 그의 문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사뭇 반가웠다. 그의 손에서 묘사되는 문장 하나하나는 간결하면서도 그 속에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이 배어있었다. 비록 2차 세계대전에서 굳건하게 독일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뒤늦게 재평가된 작가이지만, 근대 문학의 아버지라고도 일컬어지는 만큼 그가 이루어낸 문학사적인 생애는 헤르만 헤세를 비롯해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실로 위대하다 할 수 있겠다.


사랑이라는 것은 인류가 진화하고 성장해오면서 삶에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사랑을 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의 관계가 복잡·미묘하기에 온전히 진정한 사랑에 대한 의미를 정의내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기에 많은 작가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랑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지 않은가.


다만, 자신의 방랑자적인 생애에서 묻어난 고독한 존재에 대한 묘사,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 그리고 사랑에 대해 풀어놓는 작가의 생각과 이야기들을 통해 퇴색해버린 진정한 사랑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떠올려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의 또 다른 명작이라는 <굶주림(Sult)>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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