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하늘이 주신 음식이요, 젖 먹이는 것은 어머니의 천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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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젖으로 양육하는 법을 말하건대 어린 아이에 제일 적당한 식물(食物)은 그 아이 어머니의 젖이다. 이것은 하늘이 주신 식물이다. 어린 아이가 일찍 죽는 이유는 제 어머니의 젖으로 양육되지 못하는데 큰 관계가 있다. 그 증거는 서양과 우리나라의 어린 아이 죽는 수효를 비교하면 서양이 더욱 많다. 서양 사람은 젖을 오래 먹이지 못하므로 우유로 기르는 까닭이다. 서양에도 유모를 대서 기르는 나라는 어린 아이 사망률이 적으나 유모로 기르는 것이 제 어머니 젖으로 기르는 것만 같지 못하다. 우리나라 상등사회의 소아 사망이 하등사회보다 많으니 상등 사람은 아이 어머니가 편안한 것을 취하여 유모를 대서 기르는 까닭이다. 제 어머니 젖을 먹이면 어린 아이만 유익할 뿐 아니라 아이 어머니도 유익하니 음식을 잘 먹으며, 자궁을 오므라지게 하며, 이슬을 속히 거두어 산후에 몸이 속히 회복된다. 산모가 대단한 병이 없으면 친히 젖 먹일 것이다.
― 변옥, “어린 아이 기르는 법”, 〈자선부인회잡지〉, 19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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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유를 수유하는 것이 아이와 산모 모두에게 좋다는 것은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젖이야말로 하늘이 주신 최고의 음식이라는 것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상류층에서 유모를 고용하는 것은 단지 어머니의 심신이 편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유모를 두는 것은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한 일종의 풍속이었다. 그렇지만 근대 초에 이르러서는 유모를 두는 것이 오히려 육아 환경을 해칠 수 있는 병폐로 지적된 것이다. 산모가 건강하지 못해서 아이에게 젖을 물릴 수 없을 때만 어쩔 수 없이 유모를 두는 것이지, 산모의 건강 상태가 좋은데도 불구하고 유모를 두는 행위는 진정 아이를 위한 길이 아니라는 게 당시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아이에게 어머니의 젖이 최고의 음식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었지만, 모유 수유를 하지 않아서 ‘유아 사망률’이 높다는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근대 초기 계몽 지식인들이 ‘유아 사망률’에 집착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근대 국가가 출산, 출산율, 사망률 등을 따지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한 개인의 탄생이나 죽음 보다 전체 인구의 출산율과 사망률의 관리야 말로 근대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유아 사망률’이 높다는 것은 사회 전체가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다름 아닌 집단적 노동력의 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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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젖 먹이는 것은 어머니의 젖과 유모의 전과 짐승의 젖과 유분(乳粉) 등이라. 더욱이 생모의 젖을 최고 좋은 것으로 삼나니 하늘이 사람을 만들어 자성(資性)이 온순하고 자혜한 부인의 손에 위탁하고 또 아름답고 좋은 식품을 베푸는 고로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은 실로 천부(天賦)의 직분이라. 이 직분을 다하는 사람은 그 신체가 반드시 강건하고 이 직분은 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신체가 반드시 허약할지라. (……) 어린 아이에게 자신의 젖을 먹이지 않으면 애정이 반드시 부족하여 덕육(德育) 상에 결점이 많을지라. 어머니 된 사람이 어찌 유의치 아니하리오. 천명(天命)의 직책이자 의무로써 이를 방기하지 말지어다. (……) 생모가 만약 부득이한 이유로 아이에게 젖을 먹이지 못할 때면 마땅히 유모의 체격과 혈통과 연령 등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반드시 신체가 건강하며 성질이 온량(溫良)하며 혈통은 전염될 수 있는 각종 질병이 없으며, 연령은 20세로부터 34, 5세로 정하며 생모의 나이 및 출산한 날과 가급적 차이가 없어야 할지라.
― 김명준, “가정학역술(家政學譯述)”, 〈서우〉, 19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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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어머니의 ‘천직’이란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일이었다. 만약 자신의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않는 어머니가 있다면 그녀는 천직을 내팽개친 ‘나쁜 어머니’일 뿐이었다. 특히 아이가 친모의 젖을 먹지 못하면 성장 발달이나 덕성에 문제가 생기고, 더 크게는 애정결핍에 빠질 것이라는 논리는 그 전 시대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것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아이의 성장 발달을 위해, 더불어 아이의 최초 ‘스승’의 역할을 위해 유모를 들였다. 그러나 근대 초기에 들어서면 유모의 역할은 축소되어 단순히 ‘젖어멈’에 불과하게 됐으며, 아이의 양육에서 중요한 것은 ‘모성’이었다.
사농공상이란 계급이 타파되고 과부의 개가가 허용되었다고 해서 근대 사회가 전 시대보다 더 좋은 사회라고는 말하기 힘든 일이었다. 근대 사회가 됨으로써 규방으로부터 여성이 해방될 수 있었고 사회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 또한 더 활짝 열렸다고는 하지만, 결혼한 여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근대 사회는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일 뿐이었다. 근대 사회는 여성에게 ‘모성’이라는 ‘천부’의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여성을 더욱더 가정의 울타리 안으로 가두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