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토털 헬스케어? 물장수

 

 


물장수의 전성시대
  

 

   
 

물장수들은 공인된 제도로서 존재하여 방대한 조직을 자랑하고 있다. 이 일은 진지하고도 힘든 일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비용은 비싸다. 이 비싼 비용은 작업에 대한 사례금 조로 지불된다. 서울의 밀집 지대에서 물장수를 하려면 50~100달러의 권리금을 지불하고 그 자리를 사야한다. 물을 공급 받는 각 가정은 매달 요금을 지불한다. 이 물은 훠킨(firkin, 약 34리터들이의 나무통을 뜻한다. 그런데 헐버트의 이 기록은 어깨에 멘 물통 두 개의 용량을 합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보통 물통 한 개의 용량은 약 15리터였다. ―필자)을 거꾸로 세운 것과 모양이나 크기가 같은 나무통으로 운반된다. 이 통은 사람의 등에 약간 걸쳐 있으며 끈으로 어깨에 매달리어 있는 긴 나무의 양 끝에 달려 있다. 물통은 대나무 끈으로 동여매어져 있으므로 물장수가 묘한 몸짓을 하면서 걸을 때에는 물통이 흔들리어 그 동여맨 부분이 서로 마찰되어 마치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손수레의 차축에서 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나기 때문에 행인들은 물장수에게 길을 비켜준다.
― H. B. 헐버트 지음, 신복룡 옮김,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평민사, 1984(1906).

 
   
  

 

 

 

1886년 육영공원의 교사로 부임한 헐버트의 기록에 따르면 물장수는 방대한 조직을 갖춘 공인된 제도였다. 그러나 물장수가 처음부터 특정한 조직을 갖춘 채 등장한 것은 아니었으며, ‘물 판매’라는 상행위 역시 ‘공인된 제도’로서 인정받았던 것도 아니었다. 물장수가 거대한 조직을 갖추고, 더 나아가 정부로부터 ‘공인된 제도’로서 취급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물장수의 생계를 위협하는 ‘대한수도회사’의 탄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장수가 언제 등장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1800년대 전후로 그 시기를 잡는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도 잘 아는 ‘북청 물장수’도 포함된다. 물장수는 아침저녁으로 각 가정에 물을 배달하는 사람을 뜻한다. 헐버트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직업 중의 하나가 물장수라고 했다. 그만큼 물장수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08년 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서울에서 물장수를 직업으로 했던 사람은 대략 2천여 명 정도였다. 1910년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 따르면 당시 서울의 인구는 233,590명 이었으며, 이 중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3,672명이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서울 상업 인구의 15%가 물장수였던 셈이다.

물장수가 이렇게 많았던 것은 물은 배달시켜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인데, 이는 여전히 서울 시내에 있는 우물의 수질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10년대 서울 시내의 우물 수는 총 11,410개였다. 이 중에서 식수로 사용하기 부적당하다고 판단된 우물은 9,911개였다. 우물은 많았지만 식수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우물은 많지 않았으며, 개인적으로 우물을 소유한 집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울 사람들은 물장수에 의존하여 식수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짐 때문에 행인들을 의식할 여유가 없는 또 한 축의 사람들이 있다. 바로 물지게꾼이다. 물지게 양 끝에 걸린 양동이의 무게 때문에 생긴 반동으로 물지게꾼의 걸음은 빨라질 수밖에 없으며, 넘칠 만큼 물을 가득 채운 탓에 물은 자꾸만 양동이 밖으로 튀어나와 그의 뒤에는 늘 얼음 제방이 남는다. 

그들이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은 시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있다. 큰 길에서 벗어나 통행로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우물은 돌로 쌓은 원형의 샘으로 주위보다 2피트 정도 높다. 물 긷는 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인가와 아주 가깝기 때문에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직업적인 물지게꾼을 비롯해 일반 가정집의 여종 등이 하루 종일 긴 행렬을 이루며 이곳을 오고 간다.
― 퍼시벌 로웰 지음, 조경철 옮김,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Chosö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예담, 2002(1885).

 
   



물장수는 약 30리터의 물을 어깨에 지고 다녔다. 물장수는 육체적으로 힘겨운 노동을 감내해야만 하는 직업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힘겹게 지고 나른 물값은 대략 1,000갤런(약 3,785리터)에 22펜스(약 92전) 정도였다. 물장수 한 사람당 약 10~20호를 상대로 거래하였고 이들은 아침저녁으로 각 가정에 물을 배달했다. 이와는 다르게 물을 지고 다니면서 파는 물장수도 존재했다.  

 

 


이처럼 2천여 명이 물장수로 생업을 삼았지만, 이들 모두가 똑같은 물장수는 아니었다. 물장수를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이 갖춰져야 했다. 우물과 물자리(수좌, 水座)와 급수 노동이 그 요건들이었다. 한강에 물이 넘쳐 난다고 해서 그 물을 그냥 퍼다 파는 것은 아니었다. 물장수는 자신이 물을 판매하는 담당 구역이 있었고, 신참 물장수들이 자신의 구역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물장수가 물을 판매하는 담당 구역을 물자리[水座]라고 불렀으며, 이 자리의 권리를 급수권(汲水權)이라고 한다. 이 급수권은 무형의 재산으로 인정되어 매매되었다. 때문에 직접 물을 배달하지 않고 물지게꾼을 고용하면서 물자리세만 받는 물장수도 생겨났다. 물장수 중에는 북청(北靑) 출신의 물장수가 많았는데, 이들을 ‘북청 물장수’라 불렀다. 이들이 유명한 데에는 북청 사람들이 자신들의 연고지를 기반으로 똘똘 뭉쳐 급수권을 주장함으로써 ‘물장사’를 독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재력가 중에는 직접 우물을 파서 물장수에게 물을 파는 사람도 생겨났다. 따라서 물장수도 여러 계층이 존재했다. 우물을 소유하고 물장수에게 물을 파는 물장수, 급수권을 이용하여 물자리세만 받는 물장수, 물자리세를 내고 영업하는 물장수, 물자리세를 내고 영업하는 물장수에게 고용된 물지게꾼 등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을 팔아먹은 것도 그리 허황된 일만은 아니었다. 조상 대대로 대동강에서 물을 길어다 팔았다면, 대동강에서 취수할 수 있는 권리가 김선달에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선달에게 속아 넘어간 자들은 돈에 눈이 먼 상인들이었으니, 속이기가 마냥 어렵지만도 않았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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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배달문화의 초석이 물이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