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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갈 때 당신이 가져가야 할 것
윤승철 지음 / 달 / 2016년 7월
평점 :
1.
뜬금없이 고등학교 때 배웠던 시 한 편이 생각났다.
시 열 편을 외우라는 의욕 넘치는 국어선생 때문에 짧은 것을 찾다가 외워버린 시인데, 그 유명한 정현종의 <섬>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게 <섬>의 전문이다. 나머지 아홉 편은 더이상 기억에 없는데, 정현종의 <섬>만은 기억에 그대로 남아 있다.
2.
굳이 웨딩사진을 굴업도에서 찍어야겠다는 친구 때문에 집에서 나선지 7시간 만에 도착한 섬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엄청나게 바쁜 때였는데 무리하게 목금 시간을 냈다.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도중에도 전화가 울려 업무를 빠진 것에 대해 둘러대야 했다. 그치만 섬은 매력적이었다. 섬으로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에도 놀랐고, 섬을 다니는 이유도 조금 알 것 같았다. 섬에서 웨딩사진을 찍은 커플은 부부가 되어 신혼여행을 산으로 떠났다. 참 희한한 인간들이 속을 뒤집어 놓는 바람에, 섬에 끌려 갔던 찍사는 다음 섬 여행을 계획중이다.
3.
섬에 빨려 들어가는 중에 '무인도 어쩌구'하는 책을 하나 만났다. 제목이 <무인도에 갈 때 당신이 가져가야 할 것>. 참으로 심리테스트 같은 제목이군, 이라 생각하며 책 날개를 펼쳤다. 글을 지은 사람은 대학에서 시 창작을 전공했는데, 산과 사막과 섬과 남극 같은 곳을 다니는 사람이었다. 굳이 그것들을 시어(詩語)의 급수로 따지자면 초등학교 3,4학년 수준이랄까, 그치만 그것이 현실의 언어로 쓰인다면... 이 사람 참, 보통내기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4.
발랄해 보이는 표지와 다르게 문장의 느낌은 제법 묵직하다. 나는 시를 쓰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그득한 인간인지라, 아마 시를 창작했다는 작가의 이력에 콩깍지가 씌인 것일 수도 있다. 한껏 멋부린 문장들 보다는 일상적인 문장에 더 매혹되는..매혹 당하는(!) 느낌이다. 예컨대 이런 것,
이곳에선 늘 축축합니다._85
이 무인도에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먹는 것은 외로움을 덜어내는 가장 비중 있는 일이다._142
가만히 보니 파도는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_198
다시 물이 차오른다. ... 가장 피곤한 시간이다._220
겨울의 사승봉도는 유독 조용하다._246
해변을 걸으면서 일곱 개의 신발을 주웠습니다._275
5. 이런 문장들이 내게 시적인 문장으로 읽히는 것은 작가와 정현종이 섬으로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 같은 쪼렙들이야, 오, 시인!이라고 번뜩거리며 단편적인 단서만으로도 연결짓기를 좋아하니까.
6. 그치만 섬에 갈 때 가져가진 않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섬을 그리워할 때 읽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