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의 알리바이 ㅣ 푸른사상 시선 86
김춘남 지음 / 푸른사상 / 2018년 4월
평점 :
김춘남 시집 『달의 알리바이』를 읽고
-詩란 무엇인가, 언어유희 속에 감추어진 삶과 존재에 대한 성찰
김춘남 시인의 『달의 알리바이』를 읽고 떠오른 첫 생각은 바로 ‘어렵다!’ 였다.
‘에스프리, 마리아 해구, 룸비니, 베데스다 연못, 달마, 루이 14세, 천산북로, 암사지도, 혜초, 바슐라르, 낙안읍성, 요나, 열치매…….’ 등등 성경이나 불경 등 동서양의 철학과 인문학에 능통하지 않으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철학적 사유와 이리저리 꼬고 비틀어 놓은 표현법, 낯선 지명과 고어의 인용 등은 그야말로 말의 향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는 물론 시인의 철학적 사유와 삶에 대한 통찰이 그만큼 깊다는 증명이리라. 그러나 현대 철학이나 현대 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반 독자들이 시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올봄이 다 지날 무렵, 숙제처럼 내 손에 쥐어진 시집이었다. 어설픈 감상평을 쓰느니 그냥 모른 체 하는 게 나을 성 싶었다. 그러나 시집을 선물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 역시 창작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까짓것 못할 것도 없다는 배포가 생겨났다.
그렇게 수수께끼를 풀 듯 사전을 찾아가며 시를 두 번 세 번 음미하듯 읽었다. 그러자 꽉 닫혀 있던 시의 門이 열리면서 ‘아하!’ 하고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김춘남 시인의 『달의 알리바이』에 대한 나의 해석은 시인의 의도와 전혀 다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란, 때로 읽는 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도 있을 터, 내 나름대로 시집을 해석해 보았다. 시인의 의도와 맞아떨어져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이 시집을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는 정도로 읽어주면 좋겠다.
총 4부로 구성된 시집 안에는 치열하고 각박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온갖 허위의식과 부조리와 욕망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내면을 파헤쳐 참된 존재와 이상적 삶(에스프리)을 찾아 나서고 있다.
제 1부에서 현대인 또는 시인 자신으로 표상되는 시적 자아는 지난 삶을 반추하며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궁구하고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한다. 그 결과 시적 자아는 ‘세상이란 다름 아닌 나의 가슴에 달려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다. 그런데 그것은 곧바로 삶의 환희나 기쁨으로 환치되지 않고 그 진리에 반하여 사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과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마주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생전은
사후마냥 양지바르고 아늑하지 못한
구절양장에 우여곡절
…중략…
좌충우돌투성이 속 산전수전
이는 생의 표정이지.」 <p17 풍수지리설>
「다른 이의 가슴속도
첩첩 산일까,
…중략…
세상은 다름 아닌 나의 가슴
내 가슴속에 있다.」 <p20 가슴>
곧이어 시적 자아는 굴곡 많은 인생살이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과 부조리와 혼돈과 무질서’와 함께 무의식적으로 저질러온 죄를 고백하고 스스로를 단죄하기에 이른다.
「아이야, 내 속에도
쥐불을 놓거라,
더러운 쥐들이 살고 있으니,
논둑 밭둑의 마른 풀 같은 내 속에
쥐불을 놓거라.」<p32 쥐불놀이>
「마음이 담수되지 않고서는
길이 있어도
눈물은 결코 가지 않으리라.
눈물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수몰된 고향과 같은 것」 <p24 눈물길>
이는 욕망에 이끌리어 부조리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온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참회이자,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을 의미한다. 그렇다. 그 세계는 인간 본연의 순수함이 생동하는 세계 혹은 시적 자아의 이상향으로 과거와의 단절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적 자아는 꽃길처럼 아름다운 길일지라도 물질과 욕망이 앞서는 현실 속에서 그 꿈을 이루기란 결코 순탄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어디에나 있지, 고비는
멀고 먼 천산북로
험난한 길이 아닐지라도 어디서나 있기 마련」 <p36 고비사막>
「세상은 나의 꿈으로
아마 더 어려워질지도 모르고
나의 꿈, 또한
누군가에 의해 좌절될 수도 있을 테지.
그럴지라도 노래하리라.
꿈을
누구에게나
자나 깨나」 <p26 물거품의 노래>
그러면서 시적 자아는 자신의 이상 세계가 한낱 물거품으로 끝날지라도 끝끝내 그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거듭 다지고 있다.
제 2부에서 시적 자아는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분열된 현대인의 삶(혹은 시적 자아의 내면)을 조명하고 거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빗방울들이
좌우로 이동하며
서로 멱살을 붙잡고 다툰다.
다투다 함께 떨어지고 있다.」 <p40 빗방울 소묘>
「시침이 시치미를 떼고,
분침이 분침을 삼키고 있는데도,
무심한 내가 답답한지
초침은 저의 가슴을 탁, 탁 치고,
연방 손가락질을 해대며,
혀를 차고 있다.
쯧, 쯧, 쯧, 쯧……」 <p41 시간의 분노>
시적 자아의 눈에 비친 현대인들은 시간에 쫓기어 살며, 무한한 경쟁 속에서 서로를 물고 뜯고 할퀴며 싸운다. 급기야 그러한 삶의 방식은 시적 자아의 삶마저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의 방식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타인까지 파멸로 이끌어갈 수 있음을 시적 자아는 경고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근원을 밝혀내어 분열된 세상에 대한 해답을 은근슬쩍 던져준다.
「어느 날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나왔고, 우리는 동시에 대답하였다. 한 단어가 서로의 입에서 나왔을 때 우리는 기분 좋게 크게 웃었다. 그 대답은 무엇일까? …중략… 흘러드는 곳은 달라도 스며드는 곳은 같다.」 <p43 안팎으로 발효하는>
「한 길 안 되는 물속에
열 길 마음 들어찬
몸뚱아리
…중략…
싸워서는 아니 될
때와 싸운다.
싸우다가 결국 때에 밀려
어색하게 문 밖을 나서고 마는」 <p45 싸움>
즉, 우리는 몸과 때, 혹은 몸과 마음처럼 결코 싸워서는 안 될 대상과 싸우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던지고, 詩에 대한 같은 대답을 하는 두 사람을 통해 너와 나의 근원은 결코 다르지 않음을 일깨우고 있다.
「순천이면 어떻고
화순인들 어떠랴.
중요한 건,
두 사람이 함께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 <p54 순천에서 화순까지>
「산촌 서정 속 호올로 익은 감이 절로 떨어질 때, 가을 인정의 눈시울도 하늘과 한마음이 되어 붉게 물들고 있었답니다.」 <p56 감을 깎다가>
그렇다. 중요한 것은 직위, 나이, 성별, 출신 등의 외형적인 조건이 아닌 지금 이 순간 함께 존재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로써 내적인 합일을 이룬 두 사람(혹은 시적 자아의 분열된 내면)은 비로소 참된 삶으로 온전히 귀의할 수 있게 된다.
제 3부에서 시적 자아는 화려한 이력서 뒤에 감추어진 현대인의 초라한 내면을 비추고, 그 내면의 허구와 실체를 파헤쳐 참된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해 규명하고 있다.
「내 얼굴만 내밀어도
증명이 된다는 말이지만,
이는 흉상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
…중략…
내 얼굴이 이력서라 해도
주름살처럼 단 몇 줄 내력마저 담을
문장은 못 된다.
나라는 인간은.」 <p59 증명사진>
「머리끝에서 발끝, 안팎이 두루 상표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유사품에 주의합시다.
그런데, 당신은
무슨 상표요?」 <p76 상표 인간>
시적 자아는 이력서에 쓰인 몇 줄 내력과 반명함판 사진에 부각된 단정한 용모와 달리 자신의 내면은 텅 비어 내세울 것이 전혀 없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나의 내면은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나의 전부인 냥 나를 판단하고 증명하려 든다. 그리고 그것은 옷에 붙은 상표처럼 꼬리표가 되어 언제나 나를 따라다닌다. 이에 시적 자아는 그런 세상에 대한 뭔지 모를 갑갑증을 느끼고 자꾸 달아나려고 한다.
「심연을 알 수 없는 딱한 사정은
바다나 나나
매한가지였다.
…중략…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허리 산복도로를
뫼비우스 띠처럼 한 바퀴 돌고 나니,
다시금 불빛 그리워지더라.」 <p64 다시 그리워지더라>
「미궁은 오리무중의
벽이 없는 성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그의 발자국은
두루 세상에 퍼져 있다.」 <p71 그는 미궁에 산다>
그 갑갑함을 참지 못한 시적 자아는 어느 날 자신이 속한 세상으로부터 달아난다. 그런데 그 세상은 나의 꼬리표를 붙들고 근거 없는 소문들만 무성하게 양성시킬 뿐이다. ‘무수한 내’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만 그 어디에도 참된 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자아는 사람들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인정이 그리워 끊임없이 현실로 되돌아오고 만다. 그러한 삶의 반복 속에서 시적 자아는 마침내 참된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다.
「뿌리 없는 자의
빈 가슴에도 담겨 있구나.
…중략…
목숨을 자아내는 바람에
송이송이 꽃향기로
너울 이루어
시원을 향해 나아가며
마디마디 쌓인 겹겹 어둠 풀어헤쳐
가락을 일군다.」 <p61 피리>
「종달새의 꿈이 숨어 있는
밀밭의 물결 타고
밀가루 반죽을 시작하는 바슐라르」 <p72 빵 굽는 남자>
나의 텅 빈 가슴 속에 오롯이 타오르고 있는 빛, 즉 나의 꿈이자 이상향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시적 자아는 그 꿈만이 자신의 참된 모습이자, 나를 옥죄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아가 그 꿈은 다른 이의 가슴 속 잠자고 있던 꿈을 일깨워 거대한 물결처럼 세상에 널리 퍼져나가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 4부에서 시적 자아는 자신에 대한 성찰과 존재 규명에서 벗어나 우리 주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소시민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애환을 노래하고 있다.
「취객이 만든
길과 길 속에
혹처럼 자리한 동네
걸어서 가까운 길도 차로는 멀어
참는 자의 가슴속마다
복 대신 들어차는 독」 <p84 동상동>
「붉은색으로 쓰거나,
밑줄 쫙 긋거나, 고딕체로,
아니, 세 가지 모두 다
표시해놓고 싶었을 ‘떼인 돈’에는
본인 외에는 알 수 없는 사연이,
깊푸른 밤을 이루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p92 활짝 핀 홍매화 보기 됴은 봄날>
날마다 시장에 나가 물건을 파는 대신 가슴에 독을 품고 살아가는 시장 상인들, 빚쟁이에 쫓기어 숨어 사는 사람들, 술에 취해 ‘인간이 똑바로 살아야 돼’ 소리치면서도 정작 남 앞에 허리 한번 펴 보지 못한 아버지, 생존을 위해 불볕더위 속에 목이 터져라 시위를 하는 사람들 등등 꿈과 이상향을 좇고 싶어도 목구멍이 포도청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시적 자아는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즉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양심은 물론 타인을 기망하며 살아가지만 그것이 결코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을 시적 자아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시적 자아는 욕망에 사로잡혀, 혹은 호구지책을 빌미로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모를 현대인에 대해,
「한가위 보름달이 아무리 밝아도
당신의 인감일 수는 없습니다.」 <p83 달의 알리바이>
라고 선언을 하며 시를 마치고 있다.
※참고 도서 : 김춘남 시집 『달의 알리바이』 (푸른사상)
2018. 06. 完. H.버들
* 본 글은 작가의 동의없이 무단전재 및 배포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