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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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랜만에 단숨에 읽은 책. 극도로 솔직하면서도 특정한 종류의 통찰이 깊게 진행돼 담겨 있다. 자신의 몸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살피면서, 생각의 섬세함이 책 전체에 녹아있다. 


감명 깊은 부분이 많지만, 두 가지만 짚어보겠다. 첫째, 뚱뚱함은 '내가 만들어낸 감옥'이라는 표현이다. 즉,


뚱뚱하면 아무도 당신의 식습관 장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못 본 척하거나 혹은 바로 알아채기도 한다. 당신은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다. 나는 거의 평생 동안 이런저런 방식으로 숨어 살아왔다.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 나를 세상에 보이게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어려웠다.

나는 뚱뚱하지 않았고 그러다 날 뚱뚱하게 만들었다. 나의 몸이 거대하고 아무것도 뚫을 수 없는 커다란 덩어리가 되기를 바랐다. 나는 다른 여자애들과 같지 않다고, 나에게 말했다. 먹고 싶은 모든 것을 먹었고 다른 여자아이들이 원하는 모든 것까지 먹어치웠다. 너무나 자유로웠다. 내가 만들어낸 감옥 안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221쪽)


자신의 몸은 자신과 유리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인 셈이다. 


둘째, 저자는 자신이 냉정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냉정한 사람은 떫떠름하게 여길텐데, 저자는 '피부 표면 밑에 누군가 발견해주길 원하는 따뜻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외로움이, 내가 내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서서히 나에게 고착되었다는 점이다. ... 너무나 오랜 세월 모든 세상과 모든 사람으로부터 나를 차단해버렸다. 끔찍한 일이 일어났고 살아남기 위해서 장벽을 쳐야 했다. 나는 냉정하다는 소시를 자주 들었다. ... 이런 여자들에 대해 쓴 이유는 이 피부 표면 밑에 누군가 발견해주길 원하는 따뜻함이 있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냉정하지 않다. 한 번도 냉정한 사람인 적이 없었다. 나의 따뜻함은 내게 상처를 가져올 수 있는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숨겨져 있을 뿐이었다. ... 나를 나로 보아주고 언제나 받아들여줄 마음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 앞에서 나는 얼마든지 따뜻했다. (282-3쪽)


세 가지 비판적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비록 엄청난 충격이긴 하지만 과거의 한 가지 일에 뒤이어 일어난 모든 일을 소급해 생각하는, 자신의 삶의 서사화에 빠졌을지 모른다는 비판이다. 이에 대한 반박은 책 속에서 찾아보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저자가 말미에 표현했듯이 40대에 접어든 저자가 이제는 사랑을 배워나가는 단계에 있다는 점과 연결되는데, 즉 보살핌, 아낌없이 줌, 타인을 위한 삶 등에 대한 가치를 주목하게 되면 저자의 글이 무척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아쉬움이다. 문화가 주어지는 사실이라는 점에 대한 이해, 타인을 역사 속 인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태도를 페미니즘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페미니스트적 비판에 한계가 있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몸과 마음의 이분법을 당연한 것으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는 태도도 아쉬웠다.


통찰과 비판에서 아주 날카로운 면모를 보여주긴 하나 그 자체로는 썩 대단한 책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다만 나보다 공감 가는 부분이 많을 독자들에게는 더욱 감명 깊게 다가왔을 게 틀림없다.


책을 읽으며 불편하게 여겨진 점이 있어 메모해둔다. 본문을 읽기도 전에 읽어야 했던 추천사와 '번역투'의 번역이다. 글을 잘 썼다면서 부러워하는 내용으로 점철된 추천사는 책에 대해 특정한 선입견을 갖게 만들었고, 이는 마지막 장을 읽을 때까지 미세하게 계속돼 불편했다.


번역은 너무 영어식 문체를 그대로 가져다 왔기 때문에 읽는 내내 영어책을 읽는 느낌이 들었다. 말하자면 영어 문구 'very, very'를 '아주, 아주'로 번역한 식이다. 요즘은 이런 영어식 한국어가 점차 일상이 되는 것 같아 이에 관해 별다른 생각이 없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한국어의 옛스런 표현이 사라지는 게 아쉬운 내게는 이런 번역투는 실망스럽다. 단어 표현도 아쉬운 데가 많다. 예컨대 '자신'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스스로'를 넣은 부분이 참 많다.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지 모를 유행어도 많이 사용했다. 독서 집중을 방해했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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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왠지 떳떳하지 못합니다 - 공정하지 않은 세상을 향한 인류학 에세이
마쓰무라 게이치로 지음, 최재혁 옮김 / 한권의책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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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젊은 인류학자가 쓴 쉬운 인류학 개론서. 서구 정통의 인류학에 더해 (내가 보기에) 일본인적인 특유의 윤리주의를 잘 배합한 종합 이론서로 볼 수도 있다. 또 본인의 현장 연구 경험을 액자 구성으로 매 장 배치해 읽기가 지루하지 않다. 짧은 분량임에도 감정, 개인, 국가, 영토, 시장, 증여, 공평함의 윤리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주제들을 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대학에서 인류학 개론 시간에 경제인류학적 교재로 활용해도 손색이 없을 것.


다만 저자의 주장은 몇 가지 한계를 갖고 있다. 개인 주체성에 대한 모순적 설명과, 국가/시장/개인이라는 경제적 환원론을 꼽아 보겠다.


저자 주장의 핵심은 이렇다. "시장, 사회, 국가는 표면적으로는 다른 영역이라고 공언되지만, 분단된 영역은 뒤에서는 분명 연결되어 있다. 연결을 표면으로 드러내어 영역을 뛰어넘는 일이 결코 부당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노력이 공평함의 균형을 되돌리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제시하는 것이 구축 인류학이 할 수 있는 일이다." (181쪽) 여기서 국가와 시장 모두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도 할 일이 있다고 강조하는 게 특징이다. 그것은 "우선 무의식에 눈을 돌려 다양한 구실을 대면서 불균형을 정당화하고 있는 상황을 자각하고, 우리 속의 '떳떳치 못함'을 늘 움직이기 쉬운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격차를 보고 일어나는 떳떳치 못함이라 할 만한 자책의 감정은 공평함을 되돌리는 움직임을 활성화시킨다. 떳떳치 못함의 감정에는 일종의 윤리성이 깃들어 있다."(176쪽)


첫째, 책의 앞부분에서 저자는 개인의 감정이란 (교환) 관계를 통해 구축되는 것이며, 나아가 "내가 누구인지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결정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책 뒤로 갈수록 선명히 드러나는 저자 주장의 전략은 개인 각자가 무의식을 돌아보며 평등함을 되살리려는 감정에의 호소에 기반하고 있다. 모순적이다. 개인이란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다면서, 그런 만들어지는 개인들이 어떻게 또 스스로 변혁의 주체가 된다는 말인가? 


인류학의 기본 명제는 관찰자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고 현장의 상황을 통해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에티오피아에서의 관찰에 저자 본인의 윤리를 접목하고 있다. 물론 완벽한 객관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저자의 "떳떳치 못함"이라는 방법론은 관찰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사실 전혀 인류학적이지 않다.


둘째, 사회적 관계, 특히 교환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학의 전통에서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훨씬 다양하다. 환경, 종교, 친족, 언어 등등도 결정인자가 될 수 있는 요소다. 이들을 경제적 "토대"의 "상부구조"로만 치부하는 맑시즘적 관점은 물론 일리가 있지만, 맑시즘은 입증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무수히 비판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자신이 누구인지가 상대와의 관계에서 결정된다'는 주장은 상당히 큰 비약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가지 문제점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크게 약화된다. 하나의 윤리적/정치적 선언으로 축소되기까지 한다. 책은 '떳떳치 못함'이라는 독특한 영역을 이론화시켰다는 데에 특장점이 있지만,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여기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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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 젊은 페미니스트 크리스천을 위한 길라잡이
백소영 지음 / 뉴스앤조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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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평자)는 교회를 다니고 대학에서 종교인류학을 가르치는 40대 남성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장단점이 극명하다.


장점으로는 다음을 꼽겠다. 

  • 페미니스트 기독교의 역사, 쟁점을 쉽고 간명하면서도 난해한 부분들을 놓치지 않고 망라했다.
  • 남성중심주의, 보수주의, 근본주의 신학의 맹점을 신랄하고 적절하게 파헤치고 극복하고 있다.
  • 우머니스트로서의 저자의 입장을 이들 사이에 잘 위치시키고 논쟁을 잘 전개한다. 앨리스 워커의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 등. 하나님의 번성하라라는 말씀을 "살림"으로 이해하고, 여성에겐 그런 능력이 있다고 보는 입장.
  • 서양에서 생성된 페미니즘을 한국인, 한국 여성의 관점에서 보는 신선함과 문화충격 등도 적절히 배합해 설명한다.
  • 구어체의 장점을 살려, 주류 기독교 내에서 꽤 극단적일 수 있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있게끔 독자를 잘 설득한다.

이 장점들만으로도 너무 훌륭해 내 아이들에게까지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그러나 단점에 대한 주의와 함께다. 단점이라기보다는 논의의 맹점들이 선명하다. 역시나 페미니즘의 이론적 지향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저자는 페미니즘은 다양하다고 누차 주장하지만, 책의 후반부에 들어 어떤 것들은 "페미니즘이 아니다"라고 한다. 저자는 자신을 윤리주의자라 칭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더 나은, 최선의 페미니즘을 선택하고 그 입장의 장점을 주장하려 한다. 그러나 내가 볼 때에는 저자의 윤리주의적 관점은 사회, 문화별 차이에 대한 고려가 부족해 보인다. 


특히 개인주의의 근대사회를 이상적 모델로 설정한다. 페미니즘이 꼭 그래야 하는가?


또 성평등 억압 구조의 타파를 최우선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억압의 구조에는 차원이 다른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다. 젠더만이 아니라 인종, 계급, 종족 등 다양하다. 그러한 다름에 대한 고려 없이 억압받는 자들을 하나의 부류로 묶을 수 있다고 보고, 이들을 해방시키는 페미니즘이 정의를 되돌리는 방책이라고 주장한다.


즉 신학자로서 저자는 존재적 평등이 아닌 '권력의 평등'을 복음이라 전제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을 사회적 평등으로 볼 수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배제되는 자가 없는 나라"라면서, "바벨탑처럼 높이 쌓아서 이루는 나라가 아니라 수평적 마주함으로 이루는 나라"(51) 라고 한다. 왜 수직/수평의 이분법을 도입해야 할까. 하나님은 수평이라고 얘기하신 적이 없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평등하다, 특히 사회 참여의 기회 및 권리의 평등이라는 개념은 기독교와는 동떨어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체제에서 비롯된 개인주의의 개념일 뿐이다. 거기에서 핵심은 개인이지 개인 간의 관계가 아니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관계가 언제나 핵심이었다.


"남성 없이도 온전하고 완전할 수 있다는 여성의 주체 선언" (35)을 페미니즘이라 하면서, 가부장적 남성들은 이를 남성성에 대한 모욕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두 가지 점에서 실망스러운 언급이다. 첫째, 남/여든 누구든 간에, 각기 개인이 타자 "없이도 온전하고 완전하게"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가족, 공동체, 사랑을 강조한 기독교 전통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러한 페미니즘적 개인주의에 대한 불편함은 비단 가부장적인 남성들만의 소유물인 것도 아니다. 


둘째, 저자의 가부장제에 비판은 대부분 환상 또는 편견에 기반하고 있다. 사실 어느 페미니즘 서적에서도 가부장제를 제대로 비판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저자는 가부장제와 가부장제의 남용 사이의 구분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가부장제는 물론 남용되기 쉬운 제도지만, 어쨌거나 '제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부장제는 폭력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부장제 속에 사는 수많은 여성들의 다양한 주체성의 실현들을 포착하지 못하게 되고, 이들을 그저 미혹 속에 사는 불쌍한 인간들로 취급하게 된다. 가부장제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는 권력의 평등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카터 헤이워드(Carter Heyward)의 Our Passion for Justice (1984, 93쪽)를 긍정적으로 인용한다.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너는 내 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는 너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널 사랑한다는 것'은 너의 권리를 옹호해 주고, 너의 공간을 확보해 주고, 너를 지지해 주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의 힘을 이 세상 안에서 주장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너와 함께 (손잡/고) 싸워 나가는 거입니다, 너랑 싸우는 게 아니지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의미는 그래서 "혁명이여 시작되게 하라"는 뜻이에요.


"존재의 상호적 흐름"이에요. 바로 이 힘 때문에 세상은 바뀔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반 하나님적인 질서나 삶의 방식과 싸우는 투쟁을 지속할 수 있어요. 사랑은 너/를 조정하려는 힘이 아니라 관계하려는 힘이요, '우리'의 삶과 세계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만들어가는 힘이죠. 그래서 그런 사랑은 언제나 정의로운 거예요. 155~7.


'너는 너의 것'이라고 구분짓는 것은 관계의 재편일 뿐이다.


주체성의 여지에 대한 저자의 미흡한 인식이 아쉽다.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도 우리는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을 소개하며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저자의 주장은 결국 그로 회귀하는 것 같다. 즉 여성으로서 자립해 커리어를 쌓으며 주변과 나눔 및 선행을 실천하며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복음적인 사회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근본적인 모순을 간과하고 있다. 기독교는 내세 지향적 종교다. 죽음 뒤엔 영생이 있다. 현생의 삶은 일종의 테스트다. 현생의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고 천국의 상태로 만들어 내는 게 인간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관점은 기독교 신학 내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기독인에게의 소명이란 믿음이며, 믿음은 인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함에서 나온다. 사회 정의는 물론 기독교인들에게도 투쟁해야 하는 가치지만, 하나님은 그 투쟁에 뛰어드는 인간의 태도, 노력을 보시지, 그 결실을 현생에서 이루어내는 것을 보고자 하신 게 아니다.


정리하자면 오늘날 남녀 불평등의 문제는 인종주의, 환경문제, 빈부격차 등등과 더불어 당연히 심각한 문제다. 우리 각자가 여기에 크게 영향 받고 있다. 고통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하라는 것은 그간 보수 기독교의 주장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고통을 극복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운동을 제시한다. 책의 가장 큰 맹점은 비기독교적 사회운동의 교리들을 그대로 끌어들인다는 것에 있다. 관계가 아닌 개인의 권한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결국 방어적일 수 밖에 없는가? 이는 특히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 가져다 쓴 고대 그리스의 개인주의적 세계관이다. 


인간에게 언제나 필요했던 것은 다른 종류의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 기술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숱한 신학자와 신앙인들이 고백했듯이, "네 것을 모두 팔아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라는 것 같이 예수님의 겉보기엔 모순적인 언행들에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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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잘하고 글 잘 쓰게 돕는 읽는 우리말 사전 1 - 돌림풀이와 겹말풀이 다듬기 말 잘하고 글 잘 쓰게 돕는 읽는 우리말 사전 1
최종규 글, 숲노래 기획 / 자연과생태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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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새로운 눈으로 한글을 보게 해 준 책. 특히 남, 북녘의 대표 국어사전들에 있는 '돌림풀이', '겹말풀이'를 바로잡아준다. 다만 몇 가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첫째, '글쓴이가 손질한 새 말풀이'에 새로 제시한 단어 해석들이 내가 보통 가졌던 단어의 뜻과는 좀 다른 데가 여러 개 있었다. 예를 들어, '흠모'를 '섬기다, 모시다'로 푸는데(54쪽), 내 생각엔 흠모는 감정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단어이고 섬기다, 모시다는 행위, 동작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여 잘못인 것 같다. 둘째, 이해가 잘 안 되는 뜻풀이. 예를 들어, '모양'의 여덟 번 째 뜻을 ''그것처럼'을 뜻하는 말'로 해 놓았다. 대명사 속에 대명사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들어있는 꼴로, 복잡해서 쉬이 이해되지 않고 헷갈린다. 셋째, 빈정거리거나 비꼬는 투의 글쓰기가 간혹 책읽기를 불편하게 한다. 예를 들어 55쪽에는, "사전에는 ... 으로 적습니다. 그리고 ... 으로 풀이합니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 로 풀이해야 올바르지 않을까요? ... 주어야지 싶습니다." 틀린 것을 틀리다고 정확하고 바르게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고 에둘러 지적하는 것은 그런 감정 상태를 독자에게 주입시키면서 동시에 그렇게 만든 상대를 저자와 독자가 한 편이 되어 비판하는 듯한 집단주의적 사고를 불러일으킨다. 그럴 필요 없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저자는 그저 자신이 잘못이라 판단하는 것을 왜 잘못인지 뚜렷히 밝혀 놓으면 괜한 감정이 비판의 대상에 개입될 우려가 없다. 결국 이럴 때 비판은 비난이 되는 것. 존대말을 쓴다고 이런 게 해소되지는 않는다. 넷째, 근본적인 질문. 돌림풀이와 겹말풀이가 근본적으로 잘못일까? 다른 말로 풀었으면 그 말 역시 언젠가는 또 다른 말을 가져와 풀어주어야 할 것 아닌가. 언어는 언어로 풀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결국에는 독자가 함께 가진 무언의 시대적 상식에 호소하는 것. 너무 순수주의를 고집하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언어란 결국 사람들이 써야 살아있는 것이니, 순우리말을 쓰자는 뜻에야 백번 공감하지만 이런 사전으로 해결될 일은 아닌 것이다. 국어학자는 쓰이는 말에 더욱 겸손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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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살아도 호랑이처럼 등반가 시리즈 5
존 포터 지음, 전종주 옮김 / 하루재클럽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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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광활하고 높디높은 곳에서,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 모든 걸 되짚어 내려와야 함을 분명히 아는 채로 한 발 한 발 오를 수 있을 때” (492-3쪽), 바로 그때 등반가는 비로소 진정한 등반의 가치를 품고 산을 오른다.




29세로 짧은 일생을 마감한 불세출의 산악인 알렉스 매킨타이어(1954~1982). 저자는 알렉스의 리드 대학 산악부 선배이자 많은 고산등반을 함께 했던 존 포터다. 존은 알렉스의 철부지시절부터 마지막 등반이 된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까지 수많은 등반을 함께 했다.


<하루를 살아도 호랑이처럼>은 그러나 단순한 전기는 아니다. 근대등반의 역사서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대규모 히말라야 등반이 지속됐던 70년대에서 어떻게 히말라야 경량등반이 탄생했는지를 긴밀한 필치로 보여주는 등반의 미시사다. 역자 전종주는 연세대산악부 90학번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만나 친하게 된 형이다. 첫 번역임을 감안하면 역작이다.




알렉스에 비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존은 그 역시 첨예한 등반의 한가운데에서 보닝턴, 더그 스콧, 보이텍 쿠르티카 등과 많은 관계를 맺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등반가다. 알렉스의 등반관을 조명하면서 저자는 자신만의 관점에서 보는 등반의 경험과 등반에 내재된 답을 찾기 어려운 몇몇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해 알렉스와 자신 사이에 어떻게 서로 다르게 대답하며 등반해 왔는지를 탐색한다. 


즉 ‘스스로의 오름짓’에 한없이 충실하다는 의미의 등반의 정수는 알렉스와 존 사이의 상반되는 등반이해로 이어진다. 


알렉스가 쓴 1980년 시샤팡마 원정기의 첫 장에는 다음의 유명한 문구가 나온다. 이는 존이 알렉스의 등반세계를 해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 벽에의 야망에 사로잡혔고, 이 등반방식 또한 집착이 되었다(The wall was the ambition, the style became the obsession)”. 아무도 오르지 않은 벽에의 야망. “히말라야의 고봉에서 초등을 노리는 사람에게는 비범한 야망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존도 동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존은 아직 오르지 않은 수많은 산과 벽들이 세계 곳곳에 아직 남아 있다며, 상업화와 기술발달로 흐릿해져 가는 등반정신의 정수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존은 알렉스가 그토록 집착했던 경량등반의 등반방식 및 그에 담긴 등반가의 태도에 대해서는 양면적인 태도를 취한다. 야망과 집착을 수반하는 경량등반이 경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책 전반에 걸쳐 존이 탐색하고 있는 이 질문은, 다른 여타의 등반관련 서적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날카롭고도 서정적인 통찰로 이 책을 산악문학의 명작 반열에 오르는 지점이 아닌가 한다.


알렉스가 20대 초반 알프스에서 고난도 등반을 마친 뒤 히말라야에서 이어왔던 것은 고봉에서의 경량등반이었다. 주요 파트너는 폴란드의 보이텍 쿠르티카와 예지 쿠쿠츠카였다. 이들은 경직된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러시아인들처럼 군대식이지는 않고 개인적 열망을 표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폴란드인들은 국가가 통제하는 원정에 참가하더라도 개인이 우선이고 궁극이었다.”(87쪽) 대규모 원정대에 반기를 든 보이텍과 함께 알렉스는 아프가니스탄의 코 에 반다카 북동벽을 시작으로, 최대 4명을 넘지 않는 7~8천 미터 급에서의 경량등반을 추구했다. 8천 미터에서 경량등반은 사실 배낭의 무게로 따진다면 ‘경량’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왜 알렉스 및 그로 대표되는 영국 70~80세대 산악인들이 경량등반을 추구하게 되었을까? 존의 분석은 다층적이다. 먼저 당시는 냉전으로 인해 문명의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는 끝장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등반은 그들에게 일종의 도피처였다(53쪽). 섹스 피스톨즈, 조니 로튼 등의 당시 대중음악은 펑크, 무정부주의를 확산시켰다. 이어 영국 등반계의 스타 크리스 보닝턴은 집필, 강연, 매체, 협찬사 등을 활용해 먹고사는 데에 성공한 ‘전문 산악인’ 1호 였는데, 보닝턴 아래에서 자란 2세대들은 보닝턴보다는 ‘게으른’, ‘사략선원’(privateers)--19세기 중엽까지 국제법상 허용된 해적—이었다. 간단히 말해 보닝턴처럼 대스타는 아니지만 온갖 방법을 동원하면 원정비용을 조달할 수 있는 ‘각자살기’가 가능해진 첫 세대였던 것이다. 이들은 서로에게도 자신의 다음 등반 목표를 비밀로 유지하는 등 경쟁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히말라야 등반에서 경량등반이 실제적으로 가능해졌으며 동시에 등반가들이 직접적으로 직업주의와 개인주의를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경쟁은 경량등반에 필수불가결한 것인가? 존의 대답은 예/아니오로 단순하지가 않다. 우선 알렉스의 대답은 ‘예’다. 알렉스는 고산등반에서 팀을 뒤처지게 만드는 대원에 대해서는 매정하게 뿌리친다. 존은 뿌리침을 당한 이들이 이에 얼마나 쓴맛을 느끼며 돌아서야 했는지, 그리고 우정을 지키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했는지를, 그 스스로의 경험까지 아프게 적어간다. 알렉스의 마지막 등반이 되었던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1차 정찰을 마치고 악천후 속에 하산할 때, 세 명의 대원들은 체력에 따라 속도를 달리해 각자 길을 찾아 내려올 뿐이다. 알렉스와 다른 대원은 키친텐트에서 저희 둘 만이서 오른다면 훨씬 잘 오를 수 있을텐데라는 쑥덕거림을 존은 침통한 기분으로 엿듣고 만다.


알렉스가 본격적으로 최고 등반가의 반열에 들기 원한다는 뜻을 존에게 밝혔을 때, 존은 이것이 존경해야할 만한 것인지 아니면 두려워해야 하는 것인지 자문한다(455~7쪽). 즉 알렉스의 ‘최고’를 향한 열망은 존이 두려움 속에서 품었던 ‘경쟁의식’과 쌍둥이였음을 스스로의 심금을 울리는 느낌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알렉스의 벽에의 ‘야망’은 필요한 것이었으나 집착에 대해서는 존은 다른 대답을 한다. “성공하면 할수록 알렉스의 야망과 자아 둘 모두 동시에 커져 갔다.”(460쪽)


인생에서 균형을 찾으려면, 우리 모두는 어떤 상황에서도 입구와 출구 양쪽을 모두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어느 쪽으로든지 결정을 내려야한다. … 그러나 알렉스의 마음속에는, 결정을 내리는 입구와 출구가 똑같은 문이었다. 안나푸르나를 오르자, 그러면 공포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집으로 가는 길이 따를 것이고, 다시 새라와 함께할 인생의 제2막이 펼쳐질 것이다. 이 계획에 대한 장애물--안나푸르나 남벽--이 제거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585~6쪽)


여러 가지 유형의 산악인들이 책 전반에 등장한다. 실제 등반은 별로 하지 않으면서 유명한 등반과 등정을 통해 유명세를 얻은, 더그 스콧이 'TV타입'이라 부른 사람들이 있다. 메스너의 14좌 등정은 알렉스에게는 ‘숫자 놀음’일 뿐이었다. 메스너와 달리 험난한 루트를 추구했던 예지 쿠쿠츠카조차 보이텍 쿠르티카에게는 본질을 벗어난 이였다. 


알렉스는 산과 대면하는 자아(ego)의 완벽한 완성을 추구했고, 이를 산악 역사 속에 증명하고 싶어했다. 자아의 완성 앞에서는 매정하게도 발목 잡는 다른 대원은 방해가 될 뿐이었다. 산악사에서 이를 증명하려는 욕구는 결국 그의 죽음을 불렀다. 더그 스콧은 산에서 죽는 이유는 두 가지 뿐이라며, 하나는 야망이 너무 큰 경우, 다른 하나는 운이 없었던 경우라고 했다. 알렉스는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더그 스콧은 말한다. 그러나 알렉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떤 존은 이에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마지막이 된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전후를 둘러싸고 알렉스의 행동은 마치 달아나려는 산을 자아가 끝내 움켜쥐려다 벌어진 비극으로 비춰진다.


경량등반, 특히 경량등반의 방식(style)을 통해 솔직히 또 정당하게 추구하는 ‘걸음 하나하나에의 진정성’이라는 등반의 정수가 등반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등반은 산과 등반가의 만남 그 이상인 것이다. 다른 대원이 있고 다른 산악인들이 있으며 돈과 대중, 관광산업이 있다. 다음의 등반이 있고 남겨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알렉스의 어머니와 두 명의 여자친구에 대한 긴밀한 인터뷰까지, 이 책이 곳곳에서 알렉스의 인간성, 인간관계를 다각도로 비추는 이유다. 알렉스는 토마즈 후마르, 마크 트와이트 등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안겨주며 80년대 후반의 수퍼 알피니스트들의 탄생을 견인했다. 그러나 이들이 해결하지 못한 질문들이 우리는 여전히 산의 위와 아래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본다. 안나푸르나 남벽을 27시간의 경이로운 속도로 단독으로 등정하고 내려온 스위스의 율리 스텍은 이 책 첫머리에 등장한다. 그러나 단적인 예로 그는 2014년 에베레스트에서 셰르파들과의 폭행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슬픔과 고통, 분노와 모욕감을 누군가에게 안겨준다면, 등반의 진정성을 성취함으로써 얻는 등반가의 희열은 반쪽짜리로 남지 않겠는가.


나는 2014년 1월 히말라야에서 작은 등반을 했다. 후배와 단 둘이서 5~6천 미터 급 산 네 개를 오른다는 야심찬 계획을 밀어붙였다. 당시 첫 번째 산을 오르고 빙하지대를 하산하던 중, 후배와 길이 엇갈리고 말았다. 한 시간여 동안 눈 덮인 빙하지대를 후배의 발자국을 찾아 헤매던 그 때 나는 후배가 혹시 크레바스에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을 했다. 만일 그게 사실이고 그를 영영 찾지 못하게 된다면, 다시는 산에 오지 못하겠다는, 도저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절망감에 빠졌다. 즉 내게는 각자에게 진정성 있는 등반의 성취는 어디까지나 동료와, 혹은 그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취를 향한 등반가 사이의 ‘경쟁’은 등반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영국과 폴란드 및 유럽 산악인들이 지난 이백 년 동안 산을 대했던 방식에서 발생한 역사적 파편일 뿐이지 않을까. 미등봉과 신루트 초등은 점점 그 수가 줄어든다. 이들이 등반의 목표가 될 때 경쟁은 등반에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리학적 의미에서의 새로움과 등반의 창조성은 동의어가 아닐 수도 있다. 돈과 대중매체, 장비의 발달, 이동수단의 발달, 정보의 혁신, 탐험의 산업화는 산악인들에게 등반의 정수를 지금 이 세대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등반방식이 있는지 있다면 과연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그 대답은 아마도 알렉스의 짧은 생애가 보여준 가능성과 한계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즉 ‘등반방식’에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등반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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