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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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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Vendredi'는 프랑스어이고 금요일이다. 금성. 비너스의 날. 북구신화에서는
Frigg의 날. 영어로는 Friday. 로빈슨 크루소의 충직한 하인. 그렇다. 이것은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다. 제목에는 방드르디가 들어가 있지만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로빈슨
크루소다. 물론 다니엘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의 Friday와 방드르디는 비너스와
프리그보다도 다르다. 방드르디는 그저 충직한 평면적인 하인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다니엘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읽지 않았다. 물론 나는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지만, 그것은 아마도 소년판이었을 것이고, 그것이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똑같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소년판 레 미제라블 또는 '쟝발장'을 읽고
나서, 고등학교 2학년의 겨울방학때 공부하기 싫은 나머지 먼지쌓여 가던
문학전집에서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꺼내 펼쳤을 때 "쓸데없는 이야기", "주제와
상관없는 이야기", "중요해보이지 않는 묘사"는 왜 그리 많았던가! 나는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읽지 않았기 때문에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로빈슨 크루소와 얼마나 다른지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소년판 로빈슨 크루소의
기억과는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해 주기 바란다.

어렸을 때 로빈슨 크루소를 읽으면서는 신이 났다. "나도 저렇게 살아보고 싶어!"
그리고 그 책은 무인도에 떨어지더라도 '능력'을 발휘하면 재미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줬다. 그러다 머리가 굵어지면서는 정말 그렇게 살까? 이곳 저곳을
개간하며 섬을 가꾸며 부지런히? 구라야. 나같으면 뒹굴뒹굴하면서 최소한의 노동만
하면서 시간을 죽일거야. 아마 로빈슨은 프라이데이와 비역질도 했을걸. 아니. 그냥
자살해버리지 않았을까? 살긴 뭘 살아. 나외에 아무도 없는 세상인데 내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잠시 눈을 깜빡거리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세상이. 먹물이
좀 들면서부터, 그럴싸하게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면서부터 "하하, 저건 제국주의의
축소판이야. 데포는 영악하군"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어디서 주워들었겠지.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소년판의 로빈슨보다 중층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층성은 주로 그의 내면묘사, 철학적 성찰로 가득찬 독백으로 표현된다. 즉
투르니에의 이 소설은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재치있는 패러디라기 보다는, 데포가
셀커크의 경험담에 착안하여 로빈슨 크루소를 썼던 것처럼 투르니에는 데포의
로빈슨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새로운 소설을 쓴 것이다. 소설 내적인 사실관계도
데포의 것과 다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우리가 데포의, 또는 데포의 청소년판을
읽었을 때 품었음직한 의문들에 대해 투르니에적인 답변을 제공한다.

무인도에 혼자 버려진 남자의 내적 성찰이 왜 공감을 얻을까. 실제로 우리는
무인도에 버려질 일이 없는데. 무인도에 단둘이 남겨진 두 남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왜 공감을 얻을까. 실제로 우리는 그럴 일이 없는데. 다들 알지 뭘. 우린
실제로 그런 적은 없지만 그런 적 많않잖아. 결국 혼자라는 생각. 또는 결국 모든
관계가 둘의 관계로 환원된다는 생각. 이 복잡한 문명 세계 속에서 스스로
인간이라는 자각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생각. 로빈슨은 어떻게 극복했을까.
투르니에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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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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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가끔 서점의 외서 코너에 가면 Coetzee의 소설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대개 토니
모리슨의 소설들이 주루룩 꽂혀 있고 그 옆에 Coetzee의 소설들이 꽂혀 있곤 했는데
나는 이 이름을 보며 항상 궁금해 했다. '코에쩨라..저렇게 많이 꽂혀 있는데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마 미국에서만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하긴, 미국애들이
좀 그런 게 있잖아.' 근래에 와서야 Coetze가 바로 '쿳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3년 노벨 문학상의 바로 그 존 쿳시 말이다. 그러니까 토니 모리슨 옆에 있었던
거였다.

이번 주말에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었다. 자, 다른 어떠한 정보도
개입시키지 말고 제목만 가지고 상상해 보자. 어떤 내용일까.

오메가급 소설과 절친한 당신은 다음과 같은 줄거리를 떠올린다. '뉴욕시립대
인류학과의 젊은 여교수 셀마는 지적이고 도도한 여성. 일에 파묻혀 살고 검은
안경을 썼다. 이 여교수는 어느날 캄보디아로 필드 조사에 나서게 된다. 그녀는
도시인류학 전공이라 캄보디아 같은 곳엔 갈 일이 없었지만 어쩌다 참여하게 된
프로젝트 때문에 별 수 없었다. 입도 ?고 깔끔 떠는 그녀는 현지인들과 많은
마찰을 일으키는데...[중략]...셀마는 매일 밤 야만인을 기다리게 된다'

미안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이든 남자 치안판사다. 시대도 위치도 불분명한
어느 '제국'의 변경 마을의 지배자인 이 치안판사의 평온한 일상은 수도의
정보부에서 파견된 군인에 의해 급격히 깨어진다. 야만인들이 제국을 위협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변경의 마을을 관리해오던 치안판사가 보기에는
야만인들이란 없었다. 고작해야 한 줌의 어부들이나 유목민들뿐. 결국, 진실을 모른
척하지 않았던 대가를 그는 치러야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내가 터무니없는 두 죄수들을 대령에게 넘기며 '여기 있소 대령. 당신이 전문가니까 알아서 처리하시오'라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강 위쪽으로 사냥이나 갔다 와서 , 올라온 보고서를 읽지도 않고, 아니면 읽더라도 무관심하게 대충 훑어보고 수사라는 말이 무슨 의미이며 돌 밑에 깔려 있는 통곡의 요정처럼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그의 보고서에 봉인을 했더라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현명하게 처신했더라면, 어쩌면 나는 지금쯤, 도발적인 것들이 끝나고 변방에서의 불안감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냥이나 매사냥을 하고 여자에 대한 정욕을 즐기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말을 타고 떠나지 못했다.
항상 그렇듯이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다. 그런데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이용했던 분단 이후의 역사를 겪은 우리에게는 어쩌면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다. 골딩의 파리대왕,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겪은 이들에게도 익숙한 이야기다. 그러나 익숙한 주제라고 해서 이 작품이 주는 감동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인 주제라는 것은 그만큼 풀어갈 여지가 많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간만의 강한 소설이다. 우리 앞에 또다시 야만인들의 소식이 들려온다. 그 야만인들은 이번엔 국익이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했다. * 11월의 추천소설. 영화로 만들고 싶은 소설. ** '정의감'이 세뇌된 것이라면 '이기심'도 그만큼 세뇌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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