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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문지 스펙트럼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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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조라는 인물을 경멸한다. 음침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비하하고, 인간을 두려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인간을 열망하는 이 인물과 절대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다 보면 이따금 요조와 내게서 교차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나는 그 순간들이 싫어 더더욱 요조를 나와 타자화하곤 했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음침한 면에 존재하지만, 요조의 경우는 인간의 모든 끈적거리고 질척거리는 타르 점액 같은 부분만을 응집시켜 놓은 캐릭터 같다. 과도한 자기 비하는 오히려 자아 비대와 동일한 게 아닐까?


유숙자 번역의 <인간 실격>의 첫 페이지를 읽자마자 드는 생각은 '이 번역가, 일본어투를 굉장히 살려서 번역하는 편이구나'라는 것이었다. 한국어로 된 글을 읽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어로 이런 표현을 썼겠구나 가늠이 가는 번역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번역은 가독성을 해쳐 속도감 있는 독서를 방해한다고 생각하는데, <인간 실격>은 빠르게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 천천히 인물을 곱씹으며 사유해야만 의미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서 이러한 번역이 오히려 좋았다. 특히 후반부에 호리키와 요조가 말장난을 하는 부분의 원문을 살린 번역은 그 내용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삶은 트라가 아니라 코메라고 말하는 점이 인상 깊었다. 요조의 삶은 어디로 보나 코메는 아니었음에도.


요조가 싫다. 요조에 대해 지나치게 과몰입하는 사람들도 분명 나와 맞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이것마저 요조와 닮은 내 비대한 자의식이라고 생각하면 스스로가 싫어진다. 과연 내가 요조의 삶을 평가 내릴 수 있는 사람일까? 그가 인간성을 실격했다고? (물론 그러고 싶다. 아니, 사실 이미 그러고 있다.) 내게 자격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내 생애가 부끄럽지 않은 삶이었다고 내 인생의 말미에 확신할 수 있을지는 정말 모르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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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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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버지의 실종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댕기 머리 탐정 민환이가 제주로 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환이는 제주에서 노경 심방의 밑에서 함께 살고 있는 동생 매월이를 만나고, 아버지가 사라진 '숲 사건'과 관련된 비밀을 풀기 시작한다. 1426년, 사라진 열세 명의 소녀들.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남자, 소문을 쫓는 이상한 주정뱅이 사내, 민환이에게 아버지의 불 탄 일지를 보낸 여자……. 민환이는 혼란스러운 사건의 조각을 하나하나 좇으며 사건을 해결하고, 동생 매월이와의 관계를 회복한다.



이 소설의 작가인 허주은은 이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동생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그 사실을 알고 이 책을 읽으니 민환이와 매월이의 관계가 단순히 이야기 속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자매로 여겨졌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는 하지만, 반지를 끼우는 손가락은 따로 있다고 하지 않던가. 부모의 애정의 방식과 정도의 차이에서 오는 일종의 차별은, 형제자매의 관계를 쉽게 부식시키고는 한다. 매월이가 민환이를 원망했듯 말이다. 원망하면서도 보고 싶고, 보고 싶으면서도 미운 자매 사이의 관계를 잘 표현한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이 책에서 또 흥미롭게 느낀 것은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서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은 것에 있다. 옮긴이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번역서임을 깨달았을 정도다. 수많은 조선의 옛말들과 사투리 등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책을 읽으며 원서가 궁금해지는 건 오랜만이었다. 애초에 한글로 쓰여진 책인 것처럼 번역한 옮긴이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제주 사투리는 한국인에게도 낯설기 때문에, 단어 설명식으로 각주를 준 것은 아쉬웠다. 진행이 엄청 빠르게 진행되는 소설인데, 제주 사투리가 나올 때마다 툭툭 막혀서 해석을 시도해야 했다.)




'공녀'라는 명목으로 타국에, 남성에게 팔리는 소녀들. 이게 과연 고려의 이야기라고만 할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의 위안부가 그러했고 80090 횡행했던 인신매매가 그렇다. 이러한 폭력은 지금도 2022년, 현실에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 민환이와 매월이는 이 현실과 폭력에 저항하는 인물이다. 민환이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혼인을 하고자 했지만, 마지막에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현실에 저항하는 투사적 인물상에 매료되는 타입이라면 꼬옥 이 책을 읽어 봤으면 좋겠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내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있거든. 아무리 깊이 묻혀 있어도 진실은 반드시 떠오른다고. 진실은 꺾이지 않으니까. 몇 년, 몇십 년이 지나도 포기하지 않고 빛을 찾아 올라오는 게 진실이다." - P326

"이 나라의 암담함에 겁먹은 새처럼 도망쳐서 자기들끼리 웅크리고 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커다란 빛을 올곧게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 대신 싸우고 자유를 쟁취하는 사람들이 있더군.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 빛은 항상 반짝일 거요."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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