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장난
전아리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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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히 유명한 전아리의 단편 수상작들을 모아놓은 소설집이다. 작가를 투수로 빗댄다면 10개의 홀드 기록이 담긴 소설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더 긴 호흡으로 투구한 선발 등판의 기록은 찾아보지 못했지만, 홀드 기록만으로는 상당히 좋은 투수다. 별다른 기복없이 일정하게 좋은 투구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상대 타자들을 잘 상대할 줄 알고, 묵직한 직구를 비롯한 던지는 공에는 무게감이 있다.   

  젊은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성숙성을 내보인다는 게 이 소설집의 특징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다. 어머니가 무당인 전통찻집 운영자(강신무), 도서방문판매자면서 보험외판원인 싱글맘(메리크리스마스), 트랜스젠더의 다큐멘터리를 찍는 학부생(내 이름은 말야), 업소에서 공연하는 난쟁이(외발자전거), 박제사(박제), 자해공갈범인 아버지를 둔, 몸을 팔다 미혼모가 되버린 젊은 여성(작고 하얀 맨발), 번뇌하는 예비 승려(깊고 달콤한 졸음을), 노름쟁이 어머니를 둔 돈가스 판매원(파꽃), 사체업자 조직원(범람주의보), 정육점을 운영하는 여인과 딸(팔월)이 소설들 각각의 주인공이다. 결코 즐겁지도 장난스럽지도 않다. 대개 처음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담아내기 마련인데, 10편의 소설 중 자신의 이야기로 추측될만한 것이 없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경험으로는 쉽게 잡아낼 수 없는 인물들이다. 작가가 지닌 제법 풍성한 이야기 보따리가 우선 눈에 띈다. 그리고 보따리에서 꺼내든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작가의 녹록치 않은 솜씨가 도드라진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까 작업하던 파라니아의 껍질과 발사를 끌어당겼다. 발사 위에 조심스럽게 파라니아 가죽을 씌우고 접착제로 배 부분을 마무리한다. 맞물리는 부분이 뜨지 않도록 가장 섬세하게 힘이 들어가는 중지로 세심하게 눌러주어야 한다.(박제, p.122) 

 
   

 

  다만, 작가 스스로에게 생소한 세계를 설정한 것에 대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인지, 작가는 묘사에 직유를 많이 쓰고 있다. 마지막 작품 <팔월>에서는

   
 

뒷골목의 어둠은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진흙층처럼 고요하다.(팔월,p.237)

 
   

을 시작으로  

   
  아이는 장군이 벗어둔 갑옷과 투구를 치우는 졸병처럼 앞치마와 장갑을 개수대로 옮긴다. (팔월, p.238)  
   
   
  얇게 썰려 나오는 고깃점들을 보고 있노라면 살갗 위로 면도날처럼 얄팍한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듯한 한기가 느껴진다. (팔월, p.239)  
   

 와 같이 한 페이지에 하나씩 '~처럼'과 '~듯한'을 읽어낼 수 있다. 작가가 공들인 이러한 이미지들이 소설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기도 한다. 

   
  거기로 나오자 끈끈이주걱의 턱에서 떨어지는 진액처럼 무거운 땀줄기가 여자의 목덜미에서부터 가슴골로 이어진다. (팔월, p.250)
성기의 연한 살점을 끈끈이주걱에게 물린 듯한 질긴 통증과 함께 가위에 눌렸다.(팔월, p.251) 
 
   

소설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중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조금 더 살펴봐도 좋을 듯 싶다. 이것이 하나의 문체로 이어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모두 그럴법한 인물들이지만, 동시에 의외의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사실적인 소설이지만, 참신함은 부족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더불어 어느 소설 하나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없다.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을 바꾸지도 못하고 끈끈하게 엉겨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정여울 선생님의 표현대로 '정직한 직구'를 던지고 있지만, 직구만으로는 좋은 투수가 될 수 없다. 직구가 반복되다보면 간파당하기 마련이다. 이 정형성을 어떻게 깨나갈지 <시계탑>이나 <직녀의 일기장>에서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적절한 변화구를 구사할지도 모를 그녀의 선발 등판 기록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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