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래곤볼]의 수입과 대히트로 인해서 일본만화의 수입이 우후죽순으로 이뤄지던 시절, 시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불법 해적판들이었습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선 500원 짜리 만화들이 우후죽순 쏟아져나왔고 [리키오] 같은 과격파 고어만화들조차 무려 무삭제 완역판으로 팔려나가던 초기, 관련 만화들에 대한 제재 법규가 음란성 부분밖에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공권력 집행부 측에선 그 부분에 촛점을 맞추어 단속을 전개해 나갔었죠. 그래서 수많은 회사들이 잠적하고, 또 다른 이름과 간판을 들고 나오기를 반복하던 시장의 상황에서, 해적판 만화계의 전설인 알라딘(....)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알라딘이 나올 즈음의 관련 해적판 회사들은 법규의 음란성 제재 부분을 회피하기 위해 만화 캐릭터들이 비키니만 입고 있어도 화들짝 놀라선 열심히 배곱 주변에다가 엉터리 수영복을 그려놓곤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뭐 그런 수정도 그렇고, 판형도 커지고 하던 때라 가격은 이미 500원을 훌쩍 넘은 2000~3000원에 이르고 있었죠. 그런데 해적판 만화의 역사에서 알라딘이 가지는 중요한 위치는 바로 그 편집 및 수정기술을 거의 예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이었습니다.

전 10권으로 완결된 [골든보이]는 일본에서도 성인지인 빅점프에 연재되던, 아주 골수 성인만화였죠. 작가인 에가와 타츠야는 전직 수학교사이자 AV감독도 겸임하는 다재다능한 양반으로 스스로를 변태작가라고 부르기를 서슴치 않는 엄한 남자이기도 합니다. 동경대 출신이며 천재적인 머리와 운동신경을 갖춘 긴타로가 베낭을 메고 자전거 한대에 의지하여 일본 전국을 유람하며 겪는 인생공부... 를 이야기의 기둥으로 삼은 [골든보이]는 [엔젤], [키라라]와 더불어 당대 남한땅의 욕구불만 청소년들의 금서이기도 했죠. 물론 그것은 이 해적판이 유명세를 타면서부터 그리 된 것이긴 합니다만.

이런 오묘한 장면들은 알아서 잘라내고 다른 장면 갖다 붙이고.... 사실 이정도는 별로 오묘한 수준도 아닙니다만-_- 알라딘은 말그대로 완전히 새로운 [골든보이]를 창조하는데 성공합니다. 서울대생인 강성민이 팔도 유람을 하면서 얻는 인생공부라는 점은 큰틀에서 보면 원작과 일치하지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잘리고, 그렇게 수정이 가해졌음에도 말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는 건, 나중에 [골든보이] 원판을 봤을 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었죠. 그것은 실로 100% 한국판인 내용이었습니다. 저 의성어마저도 에가와 다츠야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작화에 최대한 충격을 주지 않도록 상당히 매끄럽게 새겨져 있었고, 심지어 에가와 타츠야의 본격적인 '기질'이 발휘되기 시작한 3권에 이르러서조차도, 알라딘 편집팀(과연 팀이라고 할 정도의 인원이 있었을런지는 모르겠지만)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어 역시나 원본과는 완전히 딴판이지만 완결되는 이야기, 심지어 재밌기까지 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뭐, 그외에도 같은 작가의 [동경대학이야기]를 역시나 컨버전한 [캠퍼스 러브스토리]도 어지간한 편집기술로 유명하지만, 역시나 제게는 [골든보이]에서의 솜씨가 인상 깊었다고나 할까요. 더구나 한국판 [골든보이]는 원작이 가지고 있던 짙은 보헤미안적 정서가, 에로씬이 없어진 덕에 약해진 건지 진해진 건진 모르겠습니다만, 퍽이나 인상적이고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통에 자전거 타고 전국 유랑이라는 저의 어린 날의 열망을 구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뒤로 가면서 점점 무지막지한 에로혼을 뽐내보이면서 이야기 자체도 [신세기 에반게리온] 말미의 폭주 수준으로 끌고가버린 작가 때문에 온전하게 제대로 끝을 맺진 못한 걸로 압니다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려 해적판으로, 그렇게 부숴지고 짜맞춰진 내용으로 10여권이 나올 정도로 계속 찍었었습니다....
그분들, 요즘은 어디서 뭐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분들. 정말 편집쪽에선 스카웃해도 아깝지 않은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들이었을텐데요....
사족 1.

어찌되었든 원작은 밀매업자들이 보따리로 만화를 사오던 우리나라만큼이나 자국 내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는지 OVA 6편으로 애니화도 되었습니다. 감독은 현재 일본에서 차세대 정통파 애니메이션 장인이라 불리는 콘 사토시. 1~5화는 원작의 에피소드를 차용했고 6화는 OVA의 오리지날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강도가 그리 높지 않은 1~2권에서의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만든 애니판은 별로 에로스럽진 않고 적당한 것이 딱 영지 수준의 수위를 보여주며 아직 디지털이 업계를 잡아먹지 않았던 셀애니 시절의 노가다의 결정체들을 간혹 보여줍니다. 특히 자전거VS바이크의 레이싱씬은 원작보다 대폭 파워업, 활동사진적인 쾌감을 안겨주기도 했죠.
사족 2.

이 그림은 본문의 특정한 내용과는 별 관련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제목이 어째서 '금동이'인가에 대해선 별로 의견이 분분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관심이 없었습니다만.... 저로선 저 제목이 스캇 플레이에서의 '골든'에 대한 작가의 애착이 발현된 것이 아닌지 추측해보는 바입니다-_- 확실히 만화를 보면 알겠지만, 자주 나옵니다 그게....
사족 3.
이 시점에서 이 사이트의 이름이 어째서 알라딘인지가 궁금해지는군요.... 솔직히 처음 알라딘이 도서사이트란 걸 알았을 땐, '생뚱맞게 이름이 웬 알라딘?' 이란 게 제 감상이었거든요. 설마 도서출판 알라딘의 유지를 잇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