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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프로방스
피터 메일 지음, 강주헌 옮김 / 효형출판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황순원의 <소나기> 중에서.
소년 소녀 둘이서 이리저리 쏘다니다가, 무밭에서 뽑은 무 한개 흙 슥슥 닦아(냇물에 씻어,였나?) 와삭와삭. 그때 소녀의 대사가 아직도 기억난다 : "아, 맵고 지려" ...
무가 덜 익은 탓도 있겠지만, 도시에서 온 소녀에게 알싸한 생 무의 맛은 감당하기 어려웠을 거다. 이래서 '서울촌놈'이란 말이 있는 것이다. 엄마 김장 하실때 옆에서 주워먹은 무 맛을 생각해보면 매운 건 알겠는데 지린 건 뭐지?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던 나 역시 도회지 촌놈이었단 생각을, 지금에서야 한다.
서울 촌놈 이야기 2탄이랄까. 빼놓을 수 없는 그들의 촌스러움 중 하나는 내가 '해운대에 대한 로망'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본토(!)에선 한여름 휴가철에 해운대 가는 걸 거의 미친 짓으로 취급한다. 백사장이고 바닷물이고, 물에 만 밥 알갱이처럼 빼곡빼곡 동동 떠있는 '백만인파'의 현장 근처만 가도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니까. 그러니 겨울바다의 한산함을 사랑한다는 자칭 본토박이가 집에서 뒹굴고 있을 때, 해운대 한국콘도 앞이라는 둥 헛소리를 지껄이는 서울내기들은 벼락 맞아 마땅한 인간들이 된다. 그뿐이랴. 육이오 이래로 별달리 좋아진 것도 없는 부산의 도로 사정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경포대 근방 사는 애들도 이럴까, 하고 괜히 혼자 동병상련, 알지도 못하는 강원도 친구까지 주워섬기다가, 결국은 터덜터덜 사람구경에 나서곤 했던 게 십수년전 얘기다.
피터 메일이라는 영국인이 있다. 그의 아내 역시 영국인이다. 지금은 유럽이 공동체로 묶였지만(그래봤자 나한테는 전혀 실감이 안온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영국은 영국이고 프랑스는 프랑스였다(EU가 뭐지?). 영국의 우중충한 날씨와 맛없는 음식이 전세계적으로 우울증과 농담을 유발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영국 뿐만 아니라 피부가 하얗다 못해 속눈썹까지 허연 북구 사람들은 햇볕에 목마를 수밖에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북소리>에는, 햇볕만 나면 웃통을 홀랑홀랑 벗어던지는 북유럽 토플리스족을 신기해하는 그리스 '조르바'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관광객이 바로 '관광'당하는 순간이다. 조르바들로서는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겠고(재미는 좋았겠다).
프로방스는 유럽인들에게 꿈의 땅인가 보다. <나의 프로방스>를 읽고서야 안 사실이지만, 칸 - 니스 - 모나코가 도열한 '코트다쥐르'가 바로 프로방스의 동남 해안이고, 고흐와 비제의 아를, 이름만 들어도 역사 공부가 절로 되는 듯한 아비뇽 등이 다 프로방스에 속해있다. 알퐁스 도데의 엑상프로방스야 말할 것도 없고. 그 목록에 나의 독서일지를 갖다붙이자면, 그곳은 장 지오노와 정명훈의 프로방스도 된다. 일년 중 300일 이상이 쾌청하고 따뜻하며 포도주와 올리브, 치즈가 넘치는 낙원 같은 곳이라 하는데, 과연?
바캉스 시즌이면 영국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프로방스로 몰려든다. 7번국도의 로망이랄까. 해운대 백사장에서 선탠한답시고 사람 그림자 아래에서 비비적대듯이, 칸이나 니스에서 일광욕 정도는 해 주셔야 제대로 된 바캉스를 즐겼다 생각하는 도시촌놈들이 넘쳐나는 모양이다. 그뿐만 아니라, 프로방스에 가면 연중 언제든지 젖과 꿀이 뚝뚝 떨어지는 천국같은 안식을 누릴 수 있다고들 생각한단다. 그놈의 돈만 있으면 별장 하나 세내고 귀족 대접을 받을 거라 믿고, 일년 내내 열심히 돈농사 짓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프로방스>는 여행기가 아니다. 원제 <프로방스에서의 일년>에서 알 수 있듯이, 메일 부부가 프로방스에 정착하여 살아온 얘기들을 묶은 책이다. 프랑스인들을 '개구리'라 부른다는 영국인 부부가 시골 개구리들의 본고장에서 좌충우돌하는 얘기를 읽고 있노라면 정말 개굴개굴 웃고 싶어진다. 그러나 피터 메일의 위트 넘치는 글은 맛나지만, 누가 시골사람이고 또 누가 촌놈인가 하는 걸 곰곰 따져보면 그 안에는 오돌뼈같은게 박혀있다는 느낌도 든다. 사람은 염소에 가까운가 아니면 팩시밀리에 가까운가. 사지를 가졌고 공기와 먹거리가 있어야 살 수 있고 피가 돌아야 뇌도 돈다는 것 등등, 염소랑 친한 것이 더 당연해보이는데도 우리는 팩시밀리와 더 가깝게 지낸다. 전화번호를 남기라는 자동응답기 메세지에다 대고 "내가 당신이랑 지금 말하고 있는데 왜 전화번호를 달라고 그러세요?"라며 씩씩댄 프로방스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리라. 햇살 맛이 나는 올리브유와 치즈, 흙냄새 물씬한 샐러드를 먹고 햇볕 아래 고작 반나절 돌아다닌 영국 여자의 위장과 피부가 홀랑 뒤집어진 까닭을.
프로방스 역시 사람 사는 곳이다. 날개 달린 천사들이 하얀 양젖을 짜고 포도주를 빚는 곳이 아니다. 그 이름에 홀려 사람들은 그곳 토박이들을 무시한다. 천사 아니면 시골뜨기라는 모순적인 명찰을 달아주고는, 그들의 삶에 대해선 정작 관심을 갖지 않는다. 메일 부부의 정착기가 훌륭한 것은 그들이 칸이나 니스에 혹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프로방스에서 일년여를 지내면서 그들이 한 것은 바로 프로방스 산골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프로방스식 배꼽시계에 익숙해지고, 배터지게 먹고 더운 날에는 낮잠을 자며, 친척 여자가 아니라도 뺨에 두세번 입맞춤하고, 미스트랄 부는 1,2월에는 집구석에 틀어박히기. 영국과 프랑스, 도회지와 시골의 차이를 떠나 사람 사는 재미와 인연의 소중함을 제일의 가치로 둔 그들의 소박한 마음가짐이 참 따뜻해보인다. 앵 프티 카르 되르(15분)은 '오늘 중 아무때나'를 뜻하고, 드맹(내일)은 '이번 주중 아무 때나'를 뜻한다. 가장 탄력적인 시간표현임에 틀림없는 윈 켕젠(보름)은 삼주 후를 뜻할 수도 있지만 두달 후나 내년을 뜻할 수도 있다(82쪽)는 프로방스에 팩시밀리의 신속정확한 잣대를 들이대는 건 그야말로 촌스러운 짓이다. 촌내 풀풀 풍기면서 프로방스를 '관광'하고 다니는 사람들, 그들은 모를 것이다. 자신들이야말로 구경거리라는 것을. <나의 프로방스>를 읽고 '프로방스의 로망'을 꿈꾼다면 그 순진한 독자 역시 촌스러움을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다. [경고 : 그동네 천사들은 사투리가 심하고 화장실은 아직도 푸세식이랍니다. 길 한가운데 주차를 해놓고 뽀뽀하며 큰소리로 인사해대는 사람들 때문에 당신 차는 도랑에 처박할지도 모릅니다. 미스트랄 때문에 동태가 되고 여름 한낮에는 통구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 그래도 겁낼 필요는 없겠지. 그래, 나 촌놈이다,라고 인정할 배짱만 있으면 되니까 말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것이다. 근데 그게 쉽지가 않은 게 문제렷다. 그러고보니 메일 부부는 참 대단하다. 그들은 프로방스를 정말 사랑하고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인가보다.(이런 촌스러운 감상이라니!) 위트와 따뜻함이 넘치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읽고 싶은 사람들은 피터 메일의 맛깔진 글에 귀를 기울여보기 바란다. 더불어 산다는 것에 대해 배울 수 있을테니. 재미 역시 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