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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디자인의 역사 (무선)
필립 B. 멕스 지음, 황인화 옮김 / 미진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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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언제 다 읽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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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phic 그래픽 18호 - 2011
프로파간다 편집부 엮음 / 프로파간다(잡지)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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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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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없다 - 사랑, 그 불가능에 관한 기록
잉겔로레 에버펠트 지음, 강희진 옮김 / 미래의창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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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문에서 제시한 문제의식이 본문에서 거의 구현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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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에 별이 뜨다 - 소설가 방현석과 함께 떠나는 베트남 여행
방현석 지음 / 해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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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여유롭게 소설가 방현석의 책들을 읽고 있다. 그리고 그 중 [하노이에 별이 뜨다]라는 기행산문집은 그동안 보아온 여타 여행기들보다 보다 내 마음에 기분 좋게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아는 사람은 아는 얘기지만, 방현석이라는 작가는 한국 노동사와 더불어 베트남의 역사, 정치, 문화 등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가 최근에 펴낸 소설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서의 몇몇 단편에서도 보이듯이 베트남에서의 체류 경험과 느낀 것들은 그가 가진 문제의식과 맞물려 매우 극명하고도 가깝게 전해져 온다. [하노이에 별이 뜨다]는 다소 설렁설렁하게 읽어나갈 만한, 한 아저씨가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를 싸돌아다니며 이런저런 감상을 읊어놓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기행문이다. 허나 한편으론 베트남의 현대사에 관한 나름의 깊은 식견이 있는 작가의 시각을 통해 그곳의 이야기는 단지 그곳만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 우리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나의 이야기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되어 다가온다. 그냥저냥 눈에 보이는 '사물'들을 기록한 여행기는 대개가 지리할 뿐이다. 이 책은 단지 사물이 아닌, 베트남에서 접한 '사람'들을 보고 '역사'를 의식한다.


특히 사이공 정국에 대항해 소련이나 중국과는 또다른 사회주의 건설에 애썼던 호치민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는 자못 흥미롭다. 그 중 한토막. 베트남 사람들에겐 '호 아저씨'라고 불리었으며 또 지금도 그렇게 불리우고 있는 호치민은 1940년대 프랑스의 침략에 대해, 가능한 한 "굴욕과 수모를 감수하고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며 "마지막으로 '프랑스 연방'의 일부가 되는 것마저 동의하"면서까지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프랑스는 하노이를 무력 침공함으로써 호치민의 1년이 넘는 화평 노력을 산산이 깨부순다. 이에 호치민은 결국 1946년 12월 "베트남 민주공화국 주석의 이름으로 전면적인 항전을 선언"하기에 이르고 다음과 같이 국민들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전국의 동포 여러분. 우리는 평화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까지 양보를 되풀이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보하면 하는 만큼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이를 이용해 우리의 권리를 침해해 왔습니다. 우리는 조국을 잃고, 다시 노예의 지위에 만족하기보다는 모두를 희생시키는 쪽을 선택합니다. 동포 여러분, 일어납시다. 총이 있는 사람은 총을, 칼이 있는 사람은 칼을, 칼이 없는 사람은 곡괭이나 막대기라도 좋습니다. 일어납시다.' (72)

이 책의 맥을 관통하는 작가의 생각과 고민의 지점은 베트남 전쟁과 제국주의, 그리고 무자비한 살육과 그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태도들에 있다. 어린 나이에 해방 전선 게릴라로 참여해 미군들과 총격전을 벌인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반레, 십대 소년소녀들로 구성된 분대를 이끌고 한국군과 맞서 싸운 당시 열여덟 살의 소녀 우옌티쑤언 등의 인물들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전쟁의 잔인함 뿐만 아니라 그들이 왜 그 어린 나이에 총을 들고 '베트콩'이라는 서방으로부터의 모욕적인 이름까지 얻어가며 싸워야 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아무런 가책 없이 노동계급의 한국 젊은이들은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미국의 침략에 일조를 했고, 베트남의 젊은이들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어야만 했다. 베트남의 참전용사들은 알고있다. 한국의 군인들도 자기들도 서구 열강의 지배욕에 희생당한 가엾은 민중들이라는 것을. 나는 떠올린다. 남북전쟁 당시 미군이 작정상의 편의(!)를 위해 노근리의 마을 사람들을 밖으로 내몰고선 폭격과 총질로 수백명의 어린이들과 여성, 노인을 사살한 행태와 베트남 선미 마을에서 504명의 노약자와 임산부들을 사정 없이 쏴죽인 미라이(선미) 학살 사건 사이의 유사점을.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에 지저분한 형색의 우리 아시아인들을 바라보던 광기어린 백인들의 섬뜩한 눈빛이 그려진다.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눈빛을 갖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언론에 의해 철저히 왜곡, 은폐되던 베트남에서의 진실이 양심적인 몇몇 사진 기자들과 용기 있는 민중들에 의해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면서 전세계에선 반미, 전쟁 반대 시위가 속속들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미국은 결국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듯 물러나야 했다.

여기서 나는 현재를 주시한다. 당신은 어디가 보이는가? 그렇다, 이라크. 최근 'Socialist Worker'지에 실린 한 반전 운동가의 연설 내용은 지금 나의 생각을 보다 분명하게 다잡아준다. 런던에서의 버스, 지하철 테러와 베트남 전쟁, 그리고 이라크 침공. 이 세 이슈들만 놓고 보더라도 미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속내가 교묘히 은폐되고 왜곡되는 매커니즘을 풀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의 언론이 런던 폭탄 테러에 할애하는 보도량의 4분의 1만이라도 이라크의 평범한 민간인에게 일어나는 일을 다루는 데 쓴다면" 현재 이라크에서 '진행 중인' 대학살을 막는 데에 크게 일조할 수 있으련만, 실제로 BBC나 CNN 등의 '우리가 시청하는' 언론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정부와 주요 야당 세력이 폭탄 테러가 왜 일어났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능숙하게 연기를 해낸다. 또다시 베트남은 21세기의 이라크에 와 있다. 방현석이 그의 여행 에세이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려준 베트남 전쟁의 참혹함은 곧바로 내게 있어 현재 이라크인들의 입술 위에서 반복 재생되는 듯 느껴진다. 어찌됐든 하노이에는 별이 떴다. 바그다드에는 언제쯤 별이 뜰까. 그 별이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침묵하지 말아야 하겠지. 자꾸만 침묵하려 하는 나의 이 '만들어진 습관'을 다시 한번 재고한다. 국제적인 반전 운동에 내 목소리를 더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방법을 알고 있다. [바그다드에 별이 뜨다]라는 책을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는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그 시기를 앞당길 수는 있을 거라 믿는다.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무의식적인 침묵'은 공동의 '의식적인 행동'으로 그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도 믿는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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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밤
커트 보네거트 지음 / 동인(이성모)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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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역시 보네거트의 여타 작품들처럼 비관적인 정서가 주류를 이루지만 그의 세상을 보는 태도는 '절대적으로' 비관적이지는 않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의 말을 나름대로 재인용해보자면,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태도는 유쾌한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절대적이고 확실한 태도는 아주 가소로운 상태이다. 모든 것은 회의에서부터 시작한다.'라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바로 이것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코드라 생각한다.

이 책은 독자를 상당 시간 웃음 짓게 만든다. 저자 특유의 블랙유머러스한 필치도 그렇거니와, 각각의 상황과 대사를 아이러니컬한 웃음으로 버무릴 줄 아는 재간 덕분이다. (작품의 비극적 운명론을 더욱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령 캠벨과 그의 장인과의 마지막 인사 장면은 읽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터뜨리게 하면서도 그 웃음 뒤의 진실을 뒤통수 치듯 강렬하게 전달한다. 또한 그는 풍자와 비유에 있어서도 꽤나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데, 인간의 정신분열증을 '이가 빠진 톱니바퀴'에 빗대어 설명하면서 그런 분열 증세야말로 인간이 가진 축복이라 역설하는 논리는 이 작품에 있어 그야말로 위트의 대박이라 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결말까지 이야기 전반의 분위기를 주도하는데, 이 가벼운 듯한 형식적 특성이 작품 전반의 무게를 감소시키지 않는 이유는 사물을 대하는 작가의 진지한 태도에 있다는 생각이다. 가치 있는 조롱과 냉소의 뿌리는 진지한 성찰과 그로 인한 좌절에 바탕을 두는 법이지 않은가.

이 소설은 별다른 배경지식 없이도 쉽게 읽힌다.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당시의 이데올로기적 사건이나 충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당시의 혼잡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정체를 고민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들이 희화화되어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사회 내부의 모습은 현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리뷰에서 내가 소설과 작가를 비판적 시각 없이, 추앙에 가까운 차원에서 말 그대로 '감상'하고 있다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 보네거트에 대해 미흡하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통해 나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나를 꿈꿨다. 그 정도면 됐다. 그거면 족하다. 캠벨은 결국 예루살렘의 형무소에서 자살을 결심한다. 그 역시 이제는 여태껏 자신을 지탱해왔던 일말의 생의 의미를 잃어버렸고, 그의 머릿속은 우주가 돼버렸다. 그렇다. 그렇기에 나는 이쯤에서 족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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