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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로이드 인류 - 기적과 죽음의 연대기
백승만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5년 3월
평점 :
(도서 협찬)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기대와 질문으로 시작한 독서
《스테로이드 인류》를 읽기 전, 나는 스테로이드를 둘러싼 인간의 욕망과 그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역사, 그리고 오늘날 어떻게 이 물질이 사용되고 있는지를 상세히 다룬 책일 거라고 기대했다.
특히 이 책에서 도핑 문제, 이식 수술 후 면역억제제로서의 스테로이드 활용, 그리고 현실에서 남용되고 있는 이른바 ‘무릎주사’ 같은 사례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약물의 효능과 오남용, 윤리적 경계선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셈이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뒤, 내가 만난 것은 그보다 더 깊은 이야기였다. 이 책은 단순히 약물의 쓰임을 나열하거나, 윤리 문제를 단정지어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약물이라는 작은 화학 물질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인간됨’을 구성하고, 욕망을 발화하며, 필요를 교환하는 사회를 설계하였는지 그 방식을 보여준다.
내분비학의 시대가 있었다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내분비학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스테로이드가 주인공이 되는 이 시대는, 단순한 치료의 시대가 아니다. 호르몬이 인간을 재설계하는 도구로 기능하고, 약물이 새로운 ‘정상성’을 규정하기 시작한 시기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항암 치료의 맥락에서 스테로이드가 쓰이는 다양한 방식이다. 유방암 치료에 사용되는 타목시펜, 그리고 특정 전립선암(castration-resistant prostate cancer)에서 사용되는 엔잘루타마이드와 같은 약물들은 단순한 ‘스테로이드’라는 단어로 묶기에 너무나 세분화된 기술적 진화를 보여준다. 이 약물들은 한번 개발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형되고 재해석되며, 더 나은 세대의 치료제로 진화해간다. 그런 의미에서 약물은 기술이자 역사이며, 생명과학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사회적, 윤리적 논의의 지형을 계속 바꾸는 물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욕망이 만드는 시장, 기술이 완성하는 약물
스테로이드의 시작은 회춘에 대한 욕망이었다. 브라운-세카르가 동물에서 추출한 물질을 스스로에게 투여하면서 ‘활력을 되찾았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생물학 실험이 아니었다. 욕망은 곧 필요를 만들고, 필요는 수요가 되어 시장을 형성한다. 근육을 키우려는 사람들, 늙고 싶지 않은 사람들, 더 잘 싸우고 집중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스테로이드를 시장 위로 끌어올렸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인류사에서 내분비계의 작동을 알아낸 수많은 과학적 성과조차 마치 이 강렬한 욕망의 부산물처럼 느껴질 정도다.
약물은 욕망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실험과 실패, 무엇보다도 화학적 공정의 설계라는 현실적 난관이 크다. 예컨대, 코르티손 합성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프로게스테론의 11번 탄소를 산화시키는 과정이었다. 이는 정밀한 화학 반응이 요구되어, 최신 기술을 갖춘 머크조차도 36단계의 합성 공정을 거쳐야 했다.
이때 신텍스의 화학자 제라시는 전혀 다른 접근을 취한다. 그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풀기보다, 11번 탄소가 이미 산화되어 있는 식물 유래 스테롤을 원재료로 사용하는 우회 전략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합성 단계를 절반 수준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반면 업존은 박테리아와 곰팡이의 대사 경로를 활용해, 머크와 같은 프로게스테론을 원재료로 삼고도 곰팡이의 생물학적 변환을 통해 산화를 유도하며 전체 공정을 10단계 내외로 줄였다. 이러한 기술적 접근은 단순히 생산 공정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 시스템과 화학 공학의 협업이 만들어낸 한 편의 전환 서사였다.
실패는 단지 방향을 바꾸는 계기일 뿐
신약 개발의 과정은 언제나 직선형 진보가 아니다. 돌턴의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원래 전립선암 치료용 안드로겐 길항제를 개발하려 했는데, 개발 중이던 약물 S-4가 예상과 달리 안드로겐 수용체에 대한 강력한 효능제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 물질을 포기하지 않고 근 손실 치료용 선택적 안드로겐 수용체 조절제(SARM)로 방향을 전환했다. 비록 임상시험에서 실패하여 정식 치료제로 승인받지는 못했지만, 이 약물은 스포츠계에서 도핑 약물로 사용되며 수요가 있는 ‘실패한 약물’로 남았다. 도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영역이지만, 개발 과정에서의 사고의 유연함이 만들어낸 흥미로운 결과였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사례는 관절염 치료제로서의 코르티손의 발견이다. 메이요 클리닉에서 일하던 류머티즘 전문의 헨치와 유기화학자 켄들의 협업은,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가진 이들이 만나 강력한 스테로이드의 항염 효과를 발견한 전환점이었다. 이런 종류의 협업은 제약 개발이 단순히 실험실의 일이 아니라, 교차적 플랫폼과 커뮤니케이션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남는 질문들
책을 펼치기 전 기대했던 법적, 윤리적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은 생각보다 비중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인간 욕망의 문제, 그리고 그것이 기술·경제·제도와 얽히며 어떻게 ‘약물이 인간을 구성하는 방식’을 만들어왔는지에 대해 이 책은 날카롭고도 통찰력 있게 보여준다.
나에게 남은 질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약물을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 치료와 향상의 경계는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약물이 인간을 도와주는 존재인지, 아니면 특정한 인간상에 맞추도록 강제하는 존재인지—그 질문 앞에서 나는 계속 머뭇거리게 된다.
《스테로이드 인류》는 단순한 약물 이야기 이상의 책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관리하고, 평가하며, 다시 구성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자화상이자, 우리 시대 욕망의 지도를 그리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