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세상을 조종해온 세 가지 논리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얘야 그만둬라.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그냥 숨죽이고 살아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머니께서 어린 시절의 그에게 자주 했던 말이라고 한다. ‘어차피 너 하나 그런다고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너의 그런 행동이 너의 삶을 오히려 힘들게 할 수 있다.’라는 표현 속에는 움직임을 거부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 말을 사회로 확장해보면 어떨까? ‘너의 행동은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거야.’, ‘해봤자 안될거야.’, ‘그렇게 하는게 오히려 우리의 자유에 독이 될거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이는 앨버트 O. 허시먼이 그의 저서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에서 분석한 보수주의자들의 말하기 방법들이다. 다시 말해, 보수주의자들은 역효과 명제, 무용 명제, 위험 명제를 사용하여 진보주의자들의 꿈을 꺾으려 했다.


이 책의 논지는 비교적 간단하다. 우리는 보수의 수사학을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보수주의의 논리를 파헤칠 수 있다. 그리고 보수의 수사는 크게 역효과 명제, 무용 명제, 위험 명제의 사용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사실 여기에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만큼이나 논리적인 결함도 보인다. 우선은 보수의 세 가지 명제를 살펴보고, 그 함의를 살펴본 뒤 논리적 결함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역효과 명제는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의 결과가 의도와는 달리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그 예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을 들고 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당시 프랑스는 혁명을 이루었으나 이후 온 도시가 광기에 빠지게 된다. 이 명제에 따르면 당시의 비이성은 오히려 사람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게 만들었다고 본다. 결국 숭고한 가치를 내세웠던 프랑스혁명은 원래 의도와는 다른 역효과의 결과를 가지고 왔다 비판받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역효과 명제에 대해 인간의 행위는 다양한 방향으로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역효과는 그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오히려 이러한 반응에 이제는 <캉디드>가 필요하다고 까지 주장한다.(*캉디드는 볼테르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매사가 신의 뜻에 따라 잘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태도를 가진 인물이다. 볼테르도 따지고 보면 낙관주의자는 아니었다. 결국 캉디드는 예상과는 다른 불행한 상황을 계속 맞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다음으로 무용론은 표현 그대로 어떤 행동, 변화의 시도를 하던 이는 별다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무용론은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무력감을 안긴다는 점에서 역효과 보다 더 강한 레토릭이라 평가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보통선거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어차피 민주주의 제도를 비롯한 다른 정치체제 모두 지배 권력이 피지배계층을 착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므로 어떻게 해봐야 소용없다고 하는 주장을 들 수 있다. 이 얼마나 활동가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문장들인가. 하지만 이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를 정치 혐오나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끌거나 혹은 반민주주의 담론으로 연결 짓는 것이다. 실제로 민주주의가 취약했던 이탈리아에서 이런 주장이 흘러나와 결국은 한 나라나 파시즘의 광풍에 빠지는 결과를 낳았다.


마지막으로는 위험 명제가 있는데 이는 일련의 행동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쌓아온 자유가 오히려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주장과 같다. 실제로 이러한 논리는 보통선거권의 부여가 오히려 부르주아 계급의 소유권 침해로 이어질 것이며, 복지정책의 남발로 시민들이 통제 불가능의 상태로 빠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사용되었다. 위험명제는 많은 경우에 그 신화가 제로섬 신화에 기인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A의 행동을 하면 자유는 말살될 것이다라는 레토릭이 많이 보이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실제로 세상의 많은 일은 제로섬이 아닐 수도 있다고 얘기한다.


세 가지 수사 방식은 모두 보수의 논리를 분석한 결과로 범주화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보수에게서만 나타나는 수사인가? 물론 저자에 따르면 보수에게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수사방식이기도 하지만 진보진영에서도 충분히 쓸 수 있는 레토릭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이에 따르면 오히려 이 책은 보수의 지배 수사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움직임에 반대하는, 넓은 의미에서 반동反動의 수사학이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해,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어떠한 주장이나 행동에 대해 보수 세력이든 진보세력이든 그 움직임에 반대한다면, 그 움직임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누구라도 쓸 수 있는 수사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은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로 번역되기 보다는 오히려 원전의 제목을 살려서 <움직임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레토릭> 혹은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레토릭>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나았다고 본다. (원전의 제목은 The Rhetoric of Reaction이다.)


결국 이 책은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은 어떠한 공격을 받을 수 있나로 읽히는 게 바람직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 저자는 역효과 명제에는 모든 예측 불가능한 결과가 다 부정적 결과는 아님을 얘기한다. 또한 무용론에 대해서는 일단 해봐야 보완점을 찾을 수 있으며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은 더 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위험 명제에 대해서는 인간 만사가 모두 제로섬 게임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때에 비로소 저자가 마지막에 밝힌 것처럼 대화와 끝없는 토론이 가능하며, 내전을 막는 또다른 내전의 상태가 될 수 있다. 이는 물론 무력충돌을 막는다는 점에서 훨씬 긍정적이며 민주주의의 원칙 중 하나인 다원화와도 그 궤를 같이 한다.


사실 앨버트 허시먼은 경제학자 출신이라 보수레토릭에 대해 보다 깊은 인지언어학적 접근에는 실패했다.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은 보수주의자들의 논리를 파악하는 것이었겠지만 사실 이는 때때로 진보주의자들에게도 해당된다. 결국 허시먼은 마지막에 가서는 보수의 극단으로 간 수사와 진보의 극단으로 간 수사 모두를 비판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역시나 보수의 논리, 진보의 논리가 아닌 변화를 반대하는 논리를 분석했기 때문이다.


허시먼의 바람은 이후 조지 레이코프에 가서 빛을 발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지언어학적으로 보수의 논리를 분석하여 보수의 프레임을 분석하는데 성공한다. 보수는 개인의 자유에 집중하면서 세금 등을 악마로 보며, 세상은 도처에 위험이 있는 것으로 보면서 가부장적인 태도로 이를 해결하고자 한다. 수평적 구조라기보다는 수직적 구조로 세상을 바라보며 리더의 명령과 판단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보는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오히려 보수의 용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한다. 보수의 세금감면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네가 악마야라고 말하기보다 세금의 필요성을 우리 사회에 내는 회비로 규정하라고 한다. 이는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고 보수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세금문제에 대해 호의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을 살펴볼 때 허시먼이 정말 하고 싶었던 어떻게 해야 진보적 가치가 우세할까에 대한 해답을 레이코프에 가서 얻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허시먼의 연구도 반동적 언설을 분석하는데 영향을 미쳤다는데서 큰 의의가 있다. 여전히 많은 보수층 언론이나 정치가들은 촛불시위로 인한 정국혼란을 이야기하며, 18세 참정권에 대해 정신이 미성숙한 청소년들에게 투표를 맡기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처럼 이야기하며, 법치가 오히려 중심을 못 잡고 민심에 휘둘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볼테르는 당시 유럽의 무조건적인 낙관주의 사조에 반대하기 위하여 <캉디드>라는 소설을 썼다. 무조건 옳다고 생각한 명제에 우리는 회의를 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보수는 안 되고 진보는 된다는 프레임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민주시민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역시 보수든 진보든 그들의 주장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각 쟁점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태도는 지양하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비판하며 최선의 선택지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밟아나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이 낳은 부정적 효과에 쉽게 실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수정보완책을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상식적인 사회일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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