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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코의 딸
교코 모리 지음, 김이숙 옮김 / 문예출판사 / 2000년 7월
평점 :
품절


어른이 되면 엄마는 늙을 테고 엄마와 헤어질 것이기 때문에 결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던 열두 살의 소녀 유키. 그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엄마가 자신을 떠났다. 딸이 불행한 자신처럼 성장하지 않기를, 엄마의 불행에서 벗어나 강한 여자로 커주기를 바라며 자살해버린 엄마 시즈코.

내가 처음 이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을 때, 어린 딸의 가슴에 피멍울을 남기고 떠나는 엄마의 모습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엄마의 죽음 앞에서 놀라우리 만치 침착한 어린 유키의 모습에서는 생경한 느낌마저 받았다.

육순이 지난 나의 엄마가 친구처럼 나를 의지하듯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딸은 자식이면서 친구이기 때문에 다른 관계와는 사뭇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나 자신도 이제 겨우 '엄마'를 발음하는 딸아이가 있기에 시즈코가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는지 모른다.

이 소설은 그런 엄마와 딸의 이별 이후의 이야기이다. 나는 엄마가 남겨준 고통으로 비틀린 성장기를 보내는 딸의 이야기구나 짐짓 넘겨짚고 몇 장을 넘기다가, 스르륵 소녀 유키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엄마가 죽은 지 1년 만에 다른 여자와 결혼한 아버지,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눈앞에서 없애버리려는 새엄마와 유키가 한 집에서 보낸 삭막한 날들을 이어준 것은 녹색과 청색 빛으로 그려지던 엄마에 대한 기억이었다.

수채화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고 꽃 이름을 알려주던 엄마,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던 것들을 알고 있었던 엄마, 그 엄마에 대한 기억이 유키에게 남은 세상의 전부였다.

엄마가 아끼던 찻잔세트, 윤기 돌던 접시며 받침 달린 하얀 유리잔, 엄마가 바느질해서 수놓아준 원피스...... 엄마의 기억이 담긴 물건이라면 그 무엇 하나라도 기억에서 흩어질까 싶어 생각날 때마다 스케치북을 열고 그려대는 유키. 다른 일을 하다가도 그런 기억들이 떠오를까봐 주머니에 수첩과 연필을 꽂고 다니는 그녀의 모습은 다가가 어루만져주고 싶을 만큼 너무도 안쓰러웠다.

그리도 깊은 슬픔은 표현하지 않아도 배어나오게 마련이다. 고통을 좀체 소리내어 드러내지 않는 당찬 아이였지만 그 짙은 상실감에서 나오는 독백은 듣는 이를 저릿하게 만든다.

사춘기라는 거, 엄마와 아빠의 따듯한 시선으로 지켜봐주어도 힘든 시기가 아닌가. 엄마와의 추억만으로 그 빈 자리를 채워나가는 유키는 내가 보기에 참으로 대견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여섯 해, 유키는 대학생이 되어 나가사키로 떠난다. 떠나기 전날 밤, 자신의 유년의 기억이 담긴 상자들을 쌓아둔 다락에서 엄마의 물건들을 펼쳐놓고 그 고통의 기억들과 작별하고 이제 유키는 서서히 세상으로 나아간다.

키 크고 깡말랐던 열두 살 소녀는 엄마의 기억으로 침윤된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 이제 성숙한 숙녀로 변하고 있었다.

<시즈코의 딸>은 작가의 자전소설이라기에, 유키가 나에게 남긴 강렬한 이미지는 이 소설을 쓴 작가에게로 옮겨갔다.

유키의 성숙한 모습이 이럴까? 책커버의 흑백사진에서 보이는 작가의 서글서글한 웃음이 유난히 가슴에 남는다. 자신의 아픈 과거를 이토록 맑게 소설화할 수 있게 된 지금, 그녀는 이제 행복할런지......

겹겹의 슬픔 속에서, 사람의 손길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꽃을 피우고 번성하는 제비꽃처럼 강하게 잘 자라난 유키의 이야기는 담담하게 채색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유키의 고통을 같이 느끼며 가슴과 어깨가 뻐근해질 즈음, '보석 같은 책'이라는 평에 나도 공감했다.

하나씩 꽃잎을 여는 노랗고 보랏빛을 띤 붓꽃, 덤불을 이루도록 자라서 펼쳐지는 참매발톱꽃, 라벤더 빛의 엷은 자주색 지니아. 소설 곳곳에서 맑게 뿌려지는 영상들은 간만에 만난 절제된 문체에 여운을 더해준다.

내가 들고 보는 소설책 밑에서 사부작거리다가, 책 너머로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방긋 웃는 어린 딸아이를 보면서 가만히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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