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소녀 - 개정판
델핀 드 비강 지음, 이세진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루 베르티냐크, 그녀는 지적 조숙아, 천재소녀이다. 반면, 난 천재도 아니고, 지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니다. 단지 그녀처럼 생각이 많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저렇게 생각할테지, 왜 이럴 수 밖에 없을까, 난 왜 그렇게 행동했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굴리고 또 굴린다. 딱히 엄청나고 거대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녀의 머릿속 많은 생각에서 행동까지 이루어지는 이 소설에 너무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루와 노라는 두명의 소녀가 성장하는 모습과 더불어 노숙자, 그 과정속의 신뢰, 소통 등등 많은 것을 다룬다. 사춘기가 아닌 대학생, 이제는 세상밖으로 나아가야 하는 내게 새로운 순수함, 색다른 고민을 안겨준 책이었다. 가볍게 읽기에 좋겠다 쉽게 선택한 책이었지만 결국 자신 앞에 주어진 현실을 이겨낼 수 없었던 '노'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인지 자꾸만 여운이 남았다.


우리는 방정식에서 미지수를 알아내는 법을 배우고, 등거리 직선을 긋는 법을 배우고, 공리를 증명하는 법을 배우지만 진짜 인생에서는 제출할 것도, 계산할 것도, 구해야 할 것도 없다.



내용을 잠시 적어보겠다. 천재에 가까운 루는, 동생을 잃은 후 의식이 거의 없는 엄마와, 이러한 엄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아빠와 산다. 또래보다 지능적으로 뛰어나다는 것도 있었지만 그외에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여 매번 혼자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노숙자'라는 주제의 수업발표를 위해 지하철의 '노'라는 소녀와 면담을 한다. (루는 소심해서 남 앞에서 말을 당당히 하지 못한다. 두뇌의 연결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얼떨결에 말한 주제가 노숙자였다.)

여러 차례의 면담 속에서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가까워지자, 급기야 루는 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외로움이라는 것으로 큰 공감대가 형성되었던지, 둘은 마치 가족처럼 잘 지냈다. 루의 동생을 잃고 상심하여 지내던 엄마, 아빠의 마음을 달래주듯이, 두 분도 노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루의 학급 친구, 뤼카 역시 노와 모든 즐거움을 함께 나눈다.

한 가정에 들어온 노숙자소녀는 조금씩 적응을 하고 일자리를 찾아나선다. 어렵사리 구한 일은 호텔 청소부였지만, 페이고 뭐고 사장부터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감사하면서도 만만치 않은 새벽직장, 갑작스럽게 손 안에 들어온 돈 모든 게 한순간에 변하였다. 노는 다시 술과 약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집에서 쫓겨나고 뤼카의 집으로 간다. 그렇게 노는 타락해간다.
(거의 결말에 다왔고 사실상 별 내용없지만, 여기까지만 쓰겠다. *스포주의)


언제나 사정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복잡하다. '사물은 존재하는 바로 그대로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 그렇다, 어른이 되려면 분명히 그런 걸 받아들여야 한다.



내용은 간단하다, 성장하는 청소년들의 작은 이야기, 단지 이 속에 노숙자라는 생소한 주제를 잘 녹여냈다는 것이다. 오히려 루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문장 하나하나가 내게 와닿았다. 

어렸을 적에는, 할머니집에서 사촌들과 노는 때가 많았다. 추석같은 큰 명절에는 당연히 모이지만 친척들이 가끔 날이 아닌 날에 내려오시는 경우가 있다. 헤어질 때쯤 되면 듣는 이도 없는 마음 속의 기도를 시작한다. "제발 더 놀다가게 해주세요. 간만에 만났는데 조금 더 놀면 안될까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면서요. 너무 간절해요" 이뿐이 아니었다. 학교행사가 끝나거나, 가끔 이모집 근처를 지날 때면 잠깐 만나곤 했다. 그래서 항상 그 아파트를 지날 때, 또 기도했다. "엄마가 빨리 이모한테 연락하게 해주세요, 제발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면서요, 오늘 만나서 놀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그 당시에는 간절히 바란다라는 게 잠깐 눈 꼬옥 감고 마음속으로 말하면 되는 줄 알았다. 조금이라도 더 놀고 싶은 마음에, 주워들은 말이란 말은 거의 다 이용해서 기도했다. 책을 읽다보니, 어렸을 적 작은 추억들도 떠오르고 그 속에서 내가 여기까지 성장해왔구나 많은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루가 노에게 묻는다. 
"키스할 때는 혀를 어느 방향으로 돌려야 돼?"
"뭘 그런 걸 물어보냐! 사람이 세탁기냐, 키스하는 데 방향이 어디있어!"



"바로 그 '하지만'이 문제야. '하지만' 소리만 내세워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나의 인생좌우명 중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행복하다' 이다.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관용구가 맘에 든다. 특히 쓰이는 상황이 부정적이고 열악하다면, 더 극복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상황이 어떻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할 수 있고 난 행복하다. 단, 너무 가식적인 말로 포장만 되는 것은 아닌, 마음속에서 우러나올 수 있도록 마인드를 조금씩 바꾸고 노력해야한다. 적고보니 쓸데없이 복잡하다. 





위의 글을 읽는 순간, 키작은 꼬마아이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아니면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이 말을 내게 직접적으로 한다면 어떠할까 고민되었다. '현실은 항상 이겨요, 선생님의 말씀이 옳아요, 꿈을 꾸어서는 안 되요, 세상이 우리보다 세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바꾸기를 소망해서는 안 되요.' 
뭐라고 답해주었을까.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상욱 시인이 '말하는 대로'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한 말 중에는 충고, 조언의 벽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사실상 현실의 벽에 부딪혀본 적이 많지 않다. 꿈을 싸매고 현실로 다가가기도 전에, 부모님, 친구, 선생님, 아는 사람까지 주변 사람들의 조언, 충고에 미리 좌절하기 때문이다. 그 벽을 넘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꿈이 산산조각 나는 것이다. 
"현실을 꼭 이겨야 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인생의 한 번쯤은 현실과 미친듯이 싸워봐야하지 않겠니?"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말해줄 것이다.



노는 루에게 우리는 결코 가족이 될 수 없다고 한다. 결국 둘은 어떠한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신뢰와 소통의 한계이기 전에, 자신에 대한 한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노, 자신을 둘러싼 환경은 긍정적으로 변하였지만 그저 환경일 뿐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떠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였다. 어디에 속해있는지 불분명하고 어떠한 위치를 가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노숙자들에게 돈, 따뜻함, 경제적 지위를 제공함으로써 해결할 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포기란 그저 공부를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다. 베르티냐크양도, 독자도, 어쩌면 마랭선생님도 생각치 않은 많은 의미를 담고있을 것이다. 그 속에는 할 수 있을거야, 해낼 수 있어 막연한 희망보다 오히려 더 현실감있는 메세지가 담겨있을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