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멸망의 진실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역사문고 4
양종국 지음 / 주류성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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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승자에게 유리하게 역사가 쓰여진다는 뜻이다. 우리는 학교에 들어가 역사라는 것을 배우면서 수많은 역사의 승자와 패자를 만나왔다. 우리가 배운 역사적 결론 대부분은 승자는 선(善)이고 패자는 불선(不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였다. 그러한 역사를 절대 진리인양 믿고 어떤 의심도 없이 좋은 시험 점수를 얻기 위해 달달 외워왔다.

  그러나 역사란 진정 그런 걸까? 동일한 사건, 사물이라도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의 평가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느 하나의 사료에 의한 절대적 관점이 아니라 상대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우리가 알았던 백제의 멸망은 승자의 관점에서 잘못 쓰여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는 여러 사료를 가지고 백제 멸망에 관한 진실을 파헤치고자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크게 다섯 가지  점에서 기존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고 반기를 들었다. 그 다섯 가지는  멸망의 원인, 계백장군에 대한 평가, 웅진도독부의 성격, 백강구전투에서 백강의 위치, 백제 멸망의 시기이다. 저자는 이것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주장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첫째, 백제 멸망의 원인이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배운 의자왕에 대한 지식은 너무도 단순하다. 의자왕은 궁에 삼천 궁녀를 두어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다. 또한 성충 같은 충신을 죽이고 백성을 보살피지 않았다. 그로인해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패해 나라를 잃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백제 멸망의 원인은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 실정 때문이라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 7차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660)’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저자는 백제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의자왕 관련 사료의 분석을 통하여 필자가 얻게 된 결론은 당이라는 외부세력의 개입 및 이로 인해 심각한 국력의 위축을 가져온 백제에 대한 신라의 적극적 공세라는 외적인 요인이 백제 멸망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 백제의 멸망은 내부적인 문제보다 국제관계의 변화라는 새로운 시대 상황 속에서 중국의 당이라는 외부세력의 개입 및 이를 적절히 활용한 신라의 백제에 대한 군사공격으로 인해 초래되었다고 보야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지금까지 백제의 멸망의 원인이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 그리고 그에 따른 내분에 초점을 맞춘 주장에 대해서 ‘정복자에 의한 왜곡된 역사관의 소산’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백제 멸망의 원인과 관련해서 의자왕에 대한 평가도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자왕은 무능한 왕이 아니라, 백제를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한 왕으로서 정치적인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주장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의장와의 내치는 적대국인 신라로부터 강국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외치에서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군림하게 된 당나라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독자 노선을 고집한 자주적인 그의 노력...(이하 생략)”


  즉, 의자왕은 기존의 주장과는 달리 대내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국내 정치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당나라에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자주적인 모습으로 독립국으로서 백제를 이끌어 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의자왕에 대한 기존의 왜곡된 평가 역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계백장군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리는 계백장군이 황산벌 전투에 나가기 전에, 백제가 전투에서 질 것을 예측하고 가족을 죽였다고 배웠다. 하지만 저자는 이 사실에 대해서도 의도적으로 왜곡되었다고 다음처럼 비판을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계백장군의 부인과 자식들은 실제로는 장군의 가족답게 황산벌전투에서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따라서 자결했을 가능성이 가장 클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러한 상황이 거꾸로 와전되어 왜곡되었거나 또는 신라 쪽에서 의도적으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은 내용으로 바꾸어 유포시켰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주장은 다른 여타의 주장에 비해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저자 본인이 『삼국사기』계백전의 기록을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셌째, 우리는 백제가 멸망한 후 당이 만들어 놓은 웅진도독부가 당의 괴뢰정권이고, 부여륭은 꼭두각시였다고 배웠다. 하지만 저자는 이 웅진도독부가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군사력을 바탕으로 웅진도독부를 지원 및 감시하며 주로 대외적인 군사업무를 관정하던 유인원 중심의 체제와 군사력을 중국에 의존하면서도 행정적으로는 자신들의 독자성을 확보하며 신라와의 영토문제도 그 속에서 풀어나가려 한 부여륭의 중심의 체제로 구분해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부여륭이 한 일에 주목한다. 즉, 부여륭은 신라와이 영토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독자적인 활동을 벌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웅진도독부의 독자성 강조한다. 나아가 웅진도독부가 단순히 당의 괴뢰정권이 아니라 이름만 ‘웅진도독부'였지 실제로는 ’백제‘였다고 주장을 한다.


  넷째, 백강구전투에서 백강은 지금의 ‘금강’주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금강’이 아니라 ‘동진강’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백강’을 ‘백촌강’으로 바꾸고, ‘백강구전투’를 ‘백촌강구’전투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백제 멸망의 시기도 660년이 아니라 671년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셋째 주장과 연관이 있다. 웅진도독부 자체가 백제였기 때문에 웅진도독부가 완전히 사라진 671년에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영토국가로서의 백제의 모습이 역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신라가 사비성에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도독을 임명하여 백제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시기부터라고 할 수 있는 만큼, 백제의 멸망을 671년 7월로 보는 시각 또한 성립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동시에 이와 같은 논리를 따른다면 백제의 멸망은 나․당 연합군의 협공 때문이 아니라 결국은 신라에 의해서 초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후세 사람들은 앞선 역사를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조건 절대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역사는 누구의 입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양종국 교수의  <백제 멸망의 진실>은 우리가 역사를 새롭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역사는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역사는 반복되고 강물처럼 흘러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이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역사는 과거의 사실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과거 사실에 대한 해석 및 평가이다. 당연히 과거 사람들이 기록한 역사서는 과거 사실 뿐만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과 평가가 들어간 것이다. 그 역사가가 승리자이면 승자에 유리한 내용이 들어갈 것이고, 그 역사가가 패자이면 패자에게 유리한 내용이 들어갈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배우는 사람들은 그 역사서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안목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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