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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의 탄생
신주희 지음 / 자음과모음 / 2018년 2월
평점 :
날카롭게 날 선 이야기들이 작정이라도 한 듯 우수수 쏟아진다. 사실은 나도 그랬어, 너도? 나도 그랬어. 하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새삼 들여다본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말해짐으로써 새로운 것이 되었다. 올 것이 왔다, 하는 사람과 어떻게 세상이 이럴 수 있냐고 울부짖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어지러이 오고가는 선과 선 사이에 어떤 교차점으로 남았는지 모른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그러니까 그 자리에 서 있기로 한 것은 '나'이지만 그럼에도 가까스로 유예되었던 분노의 감정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라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뼛속 깊이 박힌 무모한 인내심이 새삼스럽게도 공포스러웠다. 날카로운 목소리들이 몸 속 어딘가를 찌르는 것 같다. 요 며칠의 나는 그렇다.
그러던 중에 이 소설을 읽었다.
점, 선, 면과 같은 사람들이 부딪치고 깨질 때마다 솟아오르는 날카롭고 예리한 모서리들! 이라는 한 줄 카피가 독주를 들이켰을 때 처럼 뜨겁게 몸 속을 타고 흘렀다. 소설 속에는 참사로 인해 자식을 잃어버린 아버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아내를 찾는 남편, 아기를 잃어버린 엄마,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태아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스스로를 대변할만한 언어를 찾기 어렵다. 따라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탄식과 신음 소리는 단순히 상실에 대한 육체적 반응이 아니라, 상실에 대한 합리적 이해마저 박탈당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막막함의 무엇이었다.
보이는 것은 눈과 어둠뿐이지만 그래도 무엇인가를 보고 싶다. 가만히 있고 싶지 않다. 노인은 벼랑 끝으로 더 바짝 다가가 앉았다. 아, 이 오래된 절벽을 이제 와서 어찌할까. 생 전체를 가파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일에 낭비한 것만 같아 마음이 조급하다. (극, 144쪽)
때문에 참 힘들었다. 특별히 어떤 이야기에 몰입해서가 아니었다. 어떤 인물과 함께 탄식을 길게 내뱉었는데, 돌아서보니 더 슬프고 아픈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권의 책을 다 읽고났을때는 사방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그리고 실로 그러했다. 목사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극으로 달려가는 어느 아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당한 신음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말해지지 않았던 것을 토해내느라 지독한 성장통을 앓고있다. 하지만 운동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쓰지 않던 근육을 썼을 때 나타나는 근육통도, 며칠이면 괜찮아진다는 것을. 짧고 강렬한 그 고통이 자신의 몸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듯, 오늘 우리의 이 성장통도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다시 추스르는 계기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