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삶의 재발명 마이크로 인문학 9
임지연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두 번의 헤어짐을 겪고 다시 만난 남녀는 서로의 핸드폰에 저장된 상대의 이름을 보며, 그들이 생각하는 사랑이 어떤 것이었던지를 확인한다. 여자의 핸드폰에 그는 '정선씨'였고 남자의 핸드폰에 그녀는 '이현수'였다. 여자는 "나 아직도 그냥 '이현수'야?"라고 묻는다. 남자는 "평생 '이현수'로 살게 해주고 싶어."라고 답한다. 아, 그 순간이- 어찌나 아찔하고 아득하던지.

 

결혼하고 삼 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들은 종종 결혼생활이 어떤지 내게 물어온다. 아직도 연애 때의 그 달달한 감정들이 남아있는지, TV예능에서나 보던 알콩달콩한 생활들이 이어지는지 어떤지. 그들이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 나 역시, 그런 것들이 궁금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버진로드를 걸어 나온 그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편과 나의 삶은 쉴 새 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변화에 온몸으로 맞서 싸우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보았다. 이렇게 우리의 낭만적 사랑이 돌연 '현실'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에 대하여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변화를 받아들였고, 변화의 흐름에 우리를 맡겼다.

흔히들 결혼과 연애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한다. 맞다. 정말 다르다. 그 다름의 차원은 '주말에 만나 데이트하던 것'에서 '매일 만나는 것' 정도가 아니다. 그것의 본질은 공통점을 찾기에 급급하던 두 사람이 쉴 새 없이 서로의 차이를 마주하게 된다는 데 있다. 정말 비슷한 줄 알았는데, 같이 살아보니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더라!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은 그간 두 사람의 공통점 찾기에만 골몰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음악을 좋아하고, 같은 영화를 봤고, 내가 여행지로 삼았던 그곳을 가본 적이 있고, 내가 즐겨 마시는 종류의 커피를 좋아하는 그라지만, 그 공통점들이 차이점보다 많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사랑은 우연하고 복잡한 감정 구조와 사회 문화적 맥락, 타자 지향적 윤리가 혼합된 복잡하지만 풍요로운 경험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 외에도 모든 사람은 다양하고 복잡한 차이를 갖는 타자로 존재한다.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들은 외모, 성별, 계급, 취향, 피부, 지능, 언어, 세계관 등 모든 면에서 다르다. 따라서 고정된 차이로 인간을 이분화하는 태도는 오히려 사랑을 망친다. 사랑하는 상대는 단지 여자거나 남자라는 특성만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52쪽)

사랑이 타인에 대한 존재론적인 친밀함이라면, 동일한 존재끼리는 사랑할 수 없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을 융합, 두 사람의 하나 됨으로 이해할수록 차이는 불편한 것이 되고, 갈등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지금 나의 사랑은 뜨거운 '낭만적 경험'이기보다는 '연대'에 가깝다. 주말 아침, 늦잠을 자고 싶을 남편을 위해 아이와 슬그머니 침실을 빠져나와 오전 시간을 신나게 놀아주고- 주말 오후, 혼자 외출하고 싶었을 나를 위해 남편은 아이와의 시간을 자처한다. 그럴 때, 우리 부부는 사랑을 느낀다. 서로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끌어안지 않아도 느껴지는 진한 연대의 감정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사랑이다. 내 삶이 변했듯 상대의 삶도 변했고, 복잡하고 다면적인 변화 가운데 우리는 끊임없이 새롭게 형성되어 가고 있다. 사랑의 형태가 변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 역시 그에 맞닿아있다. 그리 길지 않은 글 속에 사랑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요리조리 쏙쏙 잘도 담아놓았구나 생각했다. <폭풍의 언덕>이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무정>, 최근작으로는 <낭만적 연애와 사랑>에 이르기까지 소설이나 신화의 인물들을 데려와 설명하고 있는 점도 흥미로웠다. 사랑이라는 주제가 아주 오래되고, 그럼에도 늘 신선한 주제인 만큼 읽는 내내 말랑거림과 단단함이 동시에 전해져왔다. 모처럼 아주 재미있게 지적 허영을 채웠다 싶다. 은행나무의 마이크로 인문학 시리즈는 아무래도 다 모으겠지, 하고도 생각했다.

사랑은 저 멀리서 빛나는 별이 아니라, 현실의 삶 속에서 연인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공동체적인 것이란 지배자인 우두머리가 없고, 이미 주어진 강령도 없는 자유롭고 협상 가능한 관계-장소를 말한다. 이 사랑의 장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사랑의 입법자는 연인들이 되어야 한다. 사랑하라는 정언명령을 따르는 이행자가 아니라, 스스로 사랑의 원리를 만들고 현실화할 수 있는 사랑의 입법자가 되어야 한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연인들이 더 좋은 삶을 살도록 변화시키며, 자폐적인 단독자의 한계를 넘어서 자유와 해방의 조건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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