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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학 기행 - 방민호 교수와 함께 걷는 문학도시 서울
방민호 지음 / arte(아르테)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유럽을 여행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예쁜 골목이나 아기자기한 건물 따위가 아니었다. 백 년, 아니 수백 년 전의 삶을 쉬이 가늠해볼 수 있다는 것. 그때의 건물과 그때의 그 길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카프카가 걸었을 그 길을 걸었고, 고흐가 또 마네가, 피카소가 오르내렸을 그 언덕을 오르내렸다. 그제야 그네들의 작품 속 하늘이 왜 그렇게 낮고 파랬던지 알 수 있었다. 그곳의 하늘이 정말 그랬으니까. 그렇게 그들의 삶의 흔적을 쫓았지만, 정작 우리 가까이에 있었던 작가들의 흔적은 찾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지우고 덮으려고만 했던 지난 시간이었다. 찾으려 한다 한들 이미 다 허물어지고, 새로 고층 빌딩이 지어졌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이 책 <서울 문학 기행>을 만났다. 읽는 내내 가슴이 몽글몽글해져왔다. 그토록 오래 지나다니던 길에, 100년 전의 공기가 덧입혀졌다. 모든 것이 변해 이제 그때의 흔적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지만, 저자의 차근한 설명에 그때의 그 길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당시 길이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1969년에 인왕산을 깎아 만든 인왕 스카이웨이도 없었을 때지요. 그 흙길을 걸어 수성동 계곡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정병욱과 윤동주는 아침부터 인왕산 중턱까지 올라 산책을 했습니다. 산의 정기를 맛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라 짐작이 됩니다. 아래로 흐르는 수성동 계곡물에 세수를 하고 내려와 함께 밥을 먹고, 윤동주는 연희전문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겠지요. 하교할 때는 기차편을 이용했다는 표현을 보면 등교할 때는 걸어 다니지 않았을까 합니다. 누상동 하숙집에서 연희전문까지는 꽤 먼 거리니, 혹여 산길에 난 지름길이 있었을 것도 같네요. 수업이 끝나면 윤동주는 충무로까지 가는 전철을 탑니다. 남촌의 서점들을 순례하며 일본에서 직수입한 책을 보고 어둑할 즈음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옵니다. (57쪽)
이 책 <서울 문학 기행>은 이상, 윤동주, 이광수에서 김수영, 박완서에 이르기까지 우리 근현대문학 작가 10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이 경성, 또 서울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던지 작품을 통해서, 또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통해서 이야기한다. 각 챕터마다 '서울 문학 기행 지도'가 실려있어 이해를 돕는다.
지금이야 서울의 범위가 남쪽으로도, 동서 쪽으로도 넓어졌지만, 일제 강점기 때만 해도 서울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이 거닐던 거리도, 그들이 바라보던 건물도 겹치게 마련이다. 책 속에는 종로와 충무로, 명동이 주로 등장하는데 그중 단연 흥미로웠던 것은 경성 미쓰코시 백화점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상의 소설 <날개>의 마지막 장면의 배경이기도 한 이곳은 한국전쟁 때 PX로 이용되기도 했다가 해방 이후 동화 백화점으로, 그 이후에는 신세계백화점이 된다. 화려한 조명 이면에 숨겨진 건물의 80년 세월을 생각하니 지난하기 그지없다. (박완서의 <나목>에는 이 건물이 미군 PX로 사용되던 시절이 나온다. 여주인공 이경이 초상화부 점원으로 들어가 일하던 곳이다)
<나목>의 주인공 이경의 퇴근길을 눈을 감고 쫓아본다. 혼란스러움과 을씨년스러움이 뒤섞인 퇴근길을 상상하자니 어쩐지 마음이 답답해 견디기가 어렵다. 화려한 간판을 내건 미군 PX 옆 노점들을 지나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들 사이로 들어설 때,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런 상상을 하자니, <나목>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왠지, 좀 더 그녀를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