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술 글쓰기 레시피 - 맛있게 쓸 수 있는 미술 글쓰기 노하우
정민영 지음 / 아트북스 / 2021년 5월
평점 :
지난 토요일, 제주에 있는 김창열 미술관에 다녀왔다. 미술관이 이곳에 터를 잡은 지는 벌써 다섯해째가 되었지만, 올 초 김창열 화백이 세상을 떠나면서야 다음 제주 여행 때는 꼭 들러야지 생각하게 되었더랬다.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한걸음 가까이 그의 작품 앞에 섰다. 익히 알고 있었던 물방울 그림들이었지만, 그림 앞에 섰을 때의 느낌은 조금 달랐다. 사실적인 물방울 표현에 감탄했던 나는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물방울이 그렇게 맺혀 있을 수 있었던 찰나의 순간들을 자꾸 상상하게 됐다. 흐르거나 흡수되지 않고, 제 몸의 선을 따라 빛을 머금은 채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짧을까. 그 순간을 그림으로 남겨 영원히 간직하고자 함은 어떤 마음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술관에서 나와, 전시를 보면서 했던 생각들을 글로 잘 풀어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쉽지 않았다. 작품 앞에 섰을 때 했던 생각은 그저 생각의 파편일 뿐이었으며, 미술관 밖으로 나섰을 때는 이미 조각나고 흩어져 이어 붙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또 그림 앞에 섰을 때 동시에 일어나던 일들-예컨대 색과 구도와 기법, 소재를 한꺼번에 느끼게 되는 일-이 글에서는 순서대로 하나씩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도 나를 꽤나 곤란하게 했다. 무엇을 우선해야 좋을까. 이 작품에서 나를 가장 긴장시켰던 것은 무엇일까. 물방울이라는 소재인가, 물방울이 떨어진 배경인가, 거기 적힌 글자인가, 구도인가. ... 그렇게 무턱대고 쌓아둔 질문 앞에서 어떤 답도 찾지 못한 나는, 결국 가장 쉬운 선택인 '쓰지 않기'를 택해버리고 만다.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아주 강렬하다고 생각했던 느낌마저 휘발되어 버리고 말 것을 알면서도.
이 책 <미술 글쓰기 레시피>는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독자들에게 미술 글쓰기의 유용성과 미술 글쓰기의 방법을 전한다. 책이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미술은 미술이고 글은 글이라는 것. 미술과 글은 서로 다른 매체이기 때문에 미술작품을 보고 느꼈던 것을 그대로 글로 옮기는 것의 어려움을 인정한다. 언어가 끝나는 곳, 언어가 닿지 않는 곳에 비로소 미술이 자리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림을 보면 어떤 느낌은 가지되 이해가 쉽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느낌이 감성의 영역이라면, 이해는 이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술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 의도된 것이 표현된 것이 아니라 표현된 것이 의도된 것으로 드러나듯- 미술에서 받은 무수한 인사이트들 가운데 우리는 무엇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것은 때로 작가의 성장과정이나 작가의 다른 작품이 될 수도 있고, 작품의 제목이나 소재, 색, 구도, 재료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때로는 작품과 동시대에 태어난 문학을 인용함으로써 작품을 보다 풍성하게 볼 수도 있을 것이고, 감상자의 에피소드가 작품을 더 의미 있게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렬하게 우리를 건드리는 무엇이 '미술 글쓰기'의 방법이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미술 글쓰기란 '작품 소개'가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를 지워내고 '느끼는 만큼 보인다'를 그 자리에 채워넣는다. 그림에 권위를 내주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체험과 생각과 감정에 우선권을 주고는- 우리 스스로에 의해 의미가 구성되고 생성되는 '삶을 위한 감상'을 해보는 것이다.
그림을 스스로 읽는다는 것은, 그림을 보며 스스로 물음표를 만들어내고 스스로 답을 찾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은 제작된 순간에 완성되는 '물건'이 아니다. 그림은 끝없는 물음표와 느낌표의 놀이를 통해 영원히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생물'이다. 그러니 우리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작품은 우리가 물음을 던지는 만큼 답한다. 질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작품에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연다는 뜻이니 당연한 일일 테다.
'글쓰기'가 주제인 책이라, 미술 작품을 많이 소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다양한 시선으로 작품을 다시 읽는 저자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 마음을 실컷 곁눈질했으니- 내일은 미술관에 가보려고 한다. 다녀와서는 꼭 '미술 글쓰기'를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