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이 그랬어 트리플 1
박서련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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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닫혀있던 어느 날들의 기록을 들추어보게 되었다. 수북하게 쌓인 노트 사이에는 이제는 더 이상 또렷하게 생각나지 않는 날들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후루룩- 빠르게 넘어가는 페이지 사이로 유난히 시선을 끄는 어떤 글을 오래 읽는다.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아닌데, 왜 더 솔직하게 쓰지 못하고 암호 같은 은유법만 잔뜩 남겼던지. 덕분에 무슨 일인지는 끝내 기억해 내지 못하고, 다만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썼는지만은 어렴풋이 가늠해볼 수 있게 되었다. 어른인 척했고, 아는 척했다는 걸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래도 지금은 스스로를 어른이라고도, 아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으니까 조금은 성장한 것 아닐까 싶다) 그렇게 껍데기만 남은 문장들은 기의가 없는 기표의 향연 같았다. 꽤 그럴듯해 보이지만,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한때는 그런 게 멋진 글이라고 생각했다. 한눈에 딱, 알 수 있는 글은 심심하게 읽혔다. 그래서 모르는 이야기를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써보려고 했다. 어떤 순간에는 진짜 안다고 믿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글을 읽었던 사람들이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런 건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므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심지어 단 한 번 고민해 본 적도 없으면서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 민망하고 웃기긴 한데- 그래도 그게 그때의 내 모습이었다. 지금은 하라고 해도 못할, 오로지 그때의 나만이 할 수 있었던 것들.


이 책 <호르몬이 그랬어>는 박서련 작가의 그런 날들에 쓰인 작품들이다. 조금 모호해도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싶었고, 감히 아무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짓고 싶었던(121-122쪽) 20대의 박서련을 30대가 된 박서련이 돌아본다. 20대의 박서련은 30대의 박서련과 다른 사람은 아니지만, 완전히 같다고도 할 수 없는 작가다. 해서 그녀는 십여 년 전의 그녀 스스로에게 '공동저자'로 승인받는 것 같은 마음으로 이 책을 내놓았다고 썼다. 하여 이 책은- 앞에 실린 세 편의 소설 뒤에 해설처럼 붙은 '...라고 썼다'라는 에세이로 완성된다. 때로는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을 만큼의 비장한 문장들 앞에서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더 넓고 깊었을 나의 지난 세계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분명히 내가 지나온 어떤 날이었으나- 그때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므로. 소설 속에 선명하게 살아있는 '그때의 나'는 '오늘의 나'로 성장하지 않을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으므로. 그러므로- 어느 지점에서는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새삼, 지난날을 돌아볼 때- 미래를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관대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은 채, '이 정도면 괜찮지?'하고 답이 정해진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내가 괜찮지 않은 건 아니지만- 20대의 나도 그렇게 생각할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지난날의 어떤 기록은 무거운 것이 되어 훅, 하고 가슴을 치고 들어온다.


표제작 '호르몬이 그랬어'의 마지막 장면을 읽으며, 나의 졸업영화가 떠올랐다. 한동안 여기저기 많이도 보여줬었는데, 마지막으로 본 지도 7년이 훌쩍 넘었다. 그걸, 지금 다시 열어볼 수 있을까. 오래된 졸업영화를 꺼내보고, 다시 이 소설을 읽는다면- 그때는 아마 또 다르게 읽힐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 나보다 어린 타인을 대할 때 그를 존중하는 태도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나도 어느 정도의 존중을 품고 기억해야겠다는 작가의 인터뷰가 오랫동안 남는다. 그래, 그랬었지. 고개를 괜히 끄덕끄덕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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