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아주 솔직히는, 책 뒤표지에 쓰인 '시의 함축성과 소설의 서사성을 갖춘 천 개의 시어가 빚어낸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말이 부담스러웠다. 책을 읽기도 전에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구조를 파악함과 동시에 그 안에 담긴 단어들의 의미까지 파악해야만 한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미션처럼 느껴졌다. 그런 부담감 때문인지, 처음 몇 장은 지독하게도 안 읽혔다. '병풍'이 함축하고 있는바는 무엇인가. '사과밭'은, 또 '아버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함의하는 바가 또렷해질리 없었고, 그래서 그냥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오히려 뭔가 선명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더랬다.

소설 <달에 울다>는 전에 읽어본 적 없던 독특한 외적 형식을 가지고 있다. 시의 행과 같은 문장이 대여섯씩 이어져 한 문단을 구성하고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런 이미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한 편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시'같기도 하고, '소설'같기도 한- 아니 어쩌면, '시'이기도 하고, '소설'이기도 한 이 이야기는 그래서 '시소설'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 없나 보다. '시'이면서 시가 아니고, '소설'이면서 소설이 아닌 이 독특한 텍스트는 너무 이완되지도, 너무 긴장되지도 않은 채 선연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표제작인 <달에 울다>는 아버지가 죽인 이웃집 남자의 딸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한 줄로 압축된 이야기 안에서 강한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눈을 감아도 강하게 자극해오는 불빛 사이로 오직 소년만이 할 수 있는 순애보적 사랑이 비쳤을 때는- 그 어떤 순간과도 비견할 수 없이 영화적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삶은 그렇게 늘 영화 같지만은 않아서, 대개의 순간 느리고- 지리멸렬하게 흘러만 간다. 사람들은 떠났고, 시간은 많이도 흘렀지만-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세상의 속도가 그만은 비켜간 듯- 오도카니 그 자리에 남아 그때를 계속해서 어루만진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결여가 생기더라도 더 이상 고립되지 않는다는 듯이.

굵은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민 것도 문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온 것도 아닌데 병풍이 흔들리고 심하게 기운다. 이어서 맞은편을 향해 푹 쓰러진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빛도 어둠도 없고, 들리는 소리는 오로지 내 숨소리뿐이다. 잠시 후 무언가 보이기 시작한다. 훨씬 멀리서, 10년 후쯤의 지점에서 만개한 꽃을 단 사과나무 한 그루가, 또는 대여섯 그루가, 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과나무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그 모두가 확실하게 보이기 직전에 몸을 뒤척여 쓰러진 병풍에서 등을 돌린다. 조금 전까지 마을 하늘에 떠 있던 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본문 중에서, 114-115쪽)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 <조롱을 높이 매달고>에서는 열심히만 살았던 인생의 전반기를 매듭짓고 M 마을로 돌아온 남자가 등장한다. 오랫동안 열심히, 혹은 건성으로 밖을 내다보는 와중에도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 M 마을은 이미 세상의 일부가 아니었고, 그가 거기에 산다고 해서 금방 속세로 바뀌지도 않을 터였다. 그러므로 그는 인생의 후반기는 잠만 자면서 보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M 마을에서라면- 파도 소리, 바다 냄새, 산들바람, 단단한 지반, 산과 들에 가득한 상큼한 공기, 그 밖의 삼라만상이 오직 그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었다. 가벼웠던 마음은, 풍화되어가는 M 마을과 함께 점점 녹슨다. 바닷바람 때문인가, 이미 속세를 오래 경험한 그의 지난날 때문인가. 첫날의 산뜻한 기분은 온데간데없다.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거기에 있어야 했던 남자와

대단한 결심으로 돌아왔지만, 다시 속세를 향해 떠나는 남자.

그리고 다시, <달에 울다>의 첫 페이지를 읽는다. 이야기의 처음 몇 장이 왜 그렇게 안 읽혔던지- 작가가 세상에 내놓고 싶었던 이미지는 무엇이었던지- 두 사람이 남긴 긴 그림자를 한참이나 보고 난 지금에야 조금 알 것도 같다.

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중천에 걸려 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다. 휘늘어진 버드나무 둥치에 털썩 주저앉은 법사는 달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비파를 타고 있다. 두 눈이 멀어 광대한 강변 일대에 쏟아지는 푸른 달빛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때가 꼬질꼬질한 그의 오체는 삼라만상을 그대로 포착하고 무궁한 시간과 공간에 녹아들어있다. 팽팽한 현의 떨림은 미적지근한 밤 기운을 자극하여 봄을 증폭시키고, 병풍 옆의 초라한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 있는 소년의 아직 두부처럼 어린 영혼에도 깊이 스며든다. (본문 중에서,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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