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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0년이 되었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대학 문에 발을 딛은지가 말입니다. '새내기'라는 말이 막 생겨날 무렵이라 처음엔 생경한 표현이었지만 '91학번 새내기 아무개'라는 말은 일년 동안 퍽이나 낯익게 되었습니다. 90년대였지만 80년대의 끝머리와 맞닿아 있어 대학문화는 아직도 80년대와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91학번 '강경대'의 죽음으로 봄을 화염병과 취루탄 속에서 보냈고, 스승을 사칭하고 외대를 찾은 총리에게 밀가루 세례를 퍼부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갖힌 선배들 때문에, 여름 내내 법원과 구치소를 찾아야 했습니다.
텐트 하나 메고 강가로 가서 며칠을 밤을 보내며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고 주량도 알지 못하고 막걸리와 소주를 퍼 마시던 그 시절. 새내기의 시절은 갔습니다. 신세대라는 후배들이 들어오고, 옳다고 믿고 살던 것들이 무너져 가는 것을 보면서, 내일이면 혁명이 올 것 같이 붉은 주먹을 움켜쥐던 선배들이,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던 이들보다도 더 세상과 타협하여, 주식과 골프를 운운하는 것을 들으며, 십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하여 알겠되었지요. 첫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그냥 간직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정직한 자기부정과 옹졸한 자기변명을 구별해 가며, 시대의 변화 속에 삶을 강건하게 다듬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삶이 부유하고 경박해짐을 느낄 때마다, 믿고 있는 것과 행동해야하는 것들 사이의 내밀한 긴장 속에 굴복해야할 때마다 나는 새내기 시절 읽었던 책 한권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 책은 어떤 유명한 정치이론도 아니고 대단한 사상가의 글도 아닌 세상의 불의함과 담대히 맞서다 이십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한 사람이 자신의 가족들에게 보낸 엽서를 묶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의 놀라움은 뜨겁고 강한 이야기를 낮고 조용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십년 넘게 옥에 갇혀 있던 이의 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아하고 정결한 어투로 삶과 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솔한 사색의 결과이며 자신을 낮추고 세상을 바라보는 '지식인의 형틀을 벗은' 지식인의 모습입니다.
이 책을 읽은 후, 신영복 선생의 서화전을 가거나 신문에 실린 글들도 빠짐 없이 읽었습니다. 감옥에 이십년이나 갔다 온 사람이 대학교수를 한다는 사실은 쉽게 믿기 어려웠지만 95년께인가 직접 신영복 선생을 본 이후 그 믿음은 분명해 졌습니다. 작은 교실에 예닐곱명이 앉아서 한 시간 남짓 그 분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식이 단지 어떤 사실을 '안다'는 것에 그치거나 어떻게 '바라보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생은 글처럼 말과 모습도 단아하고 맑게 보였습니다. 부러지기 쉬운 강함이 아니라 내적으로 성숙한 강건함이 사람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아주 귀중한 기회였습니다.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그 말 뿐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지만 세상을 담아 내는 삶의 자세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새내기 시절이고 헛된 것을 하는 것조차 의미있는 것으로 허용되는 몇 안되는 시간이지만 세상을 향한 자신의 '첫마음'을 세우는 일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첫마음은 낮에는 알지 못하다 밤에 생명같은, 힘들고 어려울 때 빛이 되어주는 등대같은 것입니다. 학교 졸업하고 이국 땅에 와서 삶과 삶 사이의 냉정함과 그 가차없는 표현으로서의 정치에 대해 공부하고 있지만 나와 세상을 향한 첫마음을 세우고 지켜가는데 [감옥..]은 내 마음의 저 밑바닥에 든든히 버텨 왔습니다. 십년 전의 새내기와 오늘의 새내기가 바라보는 세상이 정녕 다르고, 같은 책을 읽고 느끼는 것조차 진실로 다를지 모른다는 우려가 없지 않지만, 이 책이 갖고 있는 깊이 있는 사색의 향기는 시간을 떠나 그 누구도 배척하지 않고 짙게 퍼질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