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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이 죽었습니다 - 아들이 살해당한 후, 남은 가족의 끝나지 않은 고통을 추적한 충격 에세이
오쿠노 슈지 지음, 서영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책을 모두 읽고 덮으며 가장 처음 든 감정은 아무래도 분노 쪽에 가깝다. 그것은 피해자 가족의 슬픔을 이해하거나 공감해서 나온 감정이라기보다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올바른 처우를 해주지 않고 오히려 가해자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해주는 법에 대한 분노였다.
비록 이 책에서는 단 하나의 사건과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들에 대해 소개되고 있지만 잘못된 법, 관행들로 인해 고통 받았을 수많은 피해자와 그들의 가족들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한국에서도 이 책의 배경인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피해자들의 권익은 올바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살인기계라고 할 수 있는 유영철 사건 때도 우리나라 경찰들이 피해자들에게 어떠한 처우를 해주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유영철이 수갑을 찬 채 형사들의 손에 이끌려 경찰서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달려들다가 형사의 발에 맞아 나가떨어진 사건이 있지 않았던가. 물론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범을 연행하느라, 그리고 엄청나게 몰려든 취재진과 피해자 유가족들의 기세에 눌려 긴장하고 그로 인해 이성적인 대처능력이 떨어진 상태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모습을 본 국민의 가슴속에는 우리나라 경찰들에 대한 불신과 분노만이 떠올랐을 뿐이다.
‘<내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가 죽었습니다.’
아파서, 혹은 교통사고나 천재지변 등의 이유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이 죽어도 그 가족들과 지인들은 슬픔에 잠기기 마련인데, 그저 재미나 세상에 대한 빗나간 분노로 원한도 없고 안면도 없는 살인마에 의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아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살아도 산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잔혹한 살인자가 휘두른 칼에 죽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남은 가족들에게도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커다란 상처가 남는다.
산을 좋아하는 히로시의 죽음으로 인해 남은 가족,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의 삶은 공황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히로시는 수차례 칼에 의해 난자당하고 목을 잘렸다. 장난기 많고 건강한 고등학생 히로시가 처참히 살해당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것도 함께 학교를 다니던 친구의 손에 죽게 될 거라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더구나 사체를 너무나 잔인하게 훼손했으면서도 오히려 자기도 제3의 인물들에 의해 공격당했다며 태연히 거짓말하는 가해자의 모습은 경악할 만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건 정황과 가해자, 피해자가 명확히 밝혀지고 난 이후의 일이다. 학교는 살인사건을 하루빨리 덮고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피해 학생의 장례식을 학교에서 치르지 못하게 하고, 국가는 ‘갱생’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잔혹한 살인자, 가해 학생에게 가벼운 처벌을 내려 사회로 돌려보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가해자는 국가적 차원의 보조로 엘리트의 길로 들어가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사람들은 피해자의 가족들 뒤에서 수군거리고, 언론매체들은 피해자 가족의 상처를 보듬고 달래주기보다는 자극적인 일회성 기사들을 내보내기 위해 피해자 가족들을 괴롭혔다. 대체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시간도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치유해주지는 못한다. 다른 사람들도 막상 자기에게 그런 일이 닥친다면 시간이 약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죽은 히로시의 어머니 구니코에게 지난 시간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가끔은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소와는 전혀 다른 이상행동을 하게 된다.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내와 딸이 볼 수 없는 곳에 가서야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던 히로시의 아버지 츠요시. 이상행동을 보이는 아내와 밥 먹듯 자해하는 딸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그는 마냥 슬픔에만 빠져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더 큰 고통의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억누르고 현실을 이끌어나가야만 하는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고통 극복 방법은 신앙생활이었다. 피가 흥건한 아들의 시계를 씻어 손목에 찼을 때부터 츠요시의 생활은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현실에 있지만 이미 살아도 산 게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이 차츰 안정을 찾은 아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제자리를 찾은 딸을 보며 조금씩 삶에 기쁨도 느끼게 될 때쯤 그는 췌장암 선고를 받게 된다. 대체 가해자는 무슨 권리로 한 사람을 처참한 모습으로 살해하고 그 가족들의 영혼마저 파괴했다는 말인가!
오빠를 잃은 여동생의 상처도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과 상처 못지않게 크다. 히로시의 여동생 미유키는 사건의 영향으로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리고 간신히 안정을 찾아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도 그 상처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눈물 한 방울로도 가족의 붕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울 수도 없었다고 했다.
한편 살인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가벼운 처벌을 받고 사회로 나와 제자리로 돌아갔다. 오히려 더욱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하고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다. 억울한 사람의 편에서 공정한 법의 심판을 위해 일해야 할 사람이, 정작 친구를 잔혹하게 살해한 것에 대해 가족들에게 사과조차 하지 않고 보상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가 막힐 뿐이다. 오히려 자신이 왜 사과를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인면수심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과연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법은 있는 것인가. 가해자의 인권만 있고 피해자의 인권은 없는 일본 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머릿속이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