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annerist > 괴벨스를 중심에 둔 20세기 초반 독일과 나치의 연대기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ㅣ 문제적 인간 2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지음, 김태희 옮김 / 교양인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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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나치당의 독일 집권의 일등공신이자 대중선동의 달인. 이정도가 괴벨스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다. 누가 어떤 말을 하든 마음만 먹으면 감옥에 보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궤변가로서의 일화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아마도 "대중 선동의 심리학"이라는 부제가 눈에 들어와 이 책을 집어든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저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저 부제에 방점을 두고 읽으면 그가 어떤 방법으로 대중을 열광시키고 그들의 광신적 지지를 이끌어 냈는지, 그 과정의 메커니즘 - 이를테면 군중심리와 괴벨스의 선동 방법, 연설에 대한 상술 - 은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설명하리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원제가 그저 '조세프 괴벨스'이듯, '대중 선동의 심리학'은 한국어 번역판의 부제일 뿐이다. 물론 괴벨스의 대중 선동 방법은 이 책 전체에서 그의 연설 내용과 그가 사용한 수사를 광범위하게 제시하기 때문에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괴벨스의 행적에 대한 자료일 뿐다. 이 책은 괴벨스를 중심에 놓고 본 20세기 초반 독일과 나치당의 역사를 기술에 무게를 두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그렇다면 괴벨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놓고 본 20세기 초반의 독일 역사에서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

문학 박사 학위, 예술에 대한 지극한 사랑,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 자본주의와 물신주의에 대한 경멸, 현재를 부정하며 새시대와 구세주의 재림을 갈망하는 단선적이고 기독교적인 세계관,  대중선동과 프로파간다, 최종 해결책으로 제시된 홀로코스트, 광신적 국수주의, 그리고 파시즘. 도무지 융합될 수 없는 극단적 가치들이 한 사람의 정신세계에 혼재하는 게 과연 가능할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난 이렇게 이이야기하겠다. "이 사람을 보라."

괴벨스는 어린시절 골수염을 앓아 한쪽 다리를 절게 된다. 예상치못한 천형으로 인한 좌절과 낙담 속에, 그 열등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신학과 문학 등의 공부에 매진한다. 그 결과 평범한 독일 중산층의 넷째로 태어난 괴벨스는 문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게 된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면 자신이 처한 열등감과 육체적, 물질적 고난에서 벗어날 것이라 생각했던 건 희망일 뿐이었다. 1차 세계대전 직후의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괴벨스는 자신의 정신적 이상과 현실적 조건 사이의 불화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현실을 현실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한 괴벨스는 구원자에 대한 갈망과 그 믿음의 육화(肉化)라는 종교적 세계로 도피하게 된다. 피폐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찾아나가는 대신, 믿음이 강해질수록, 그 우상을 광신적으로 숭배할수록 자신은 더 강한 생명력을 얻게 되고 더 힘차게 된다(p. 106)고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이에 걸맞는 우상을 찾게 된다. 자기보다 강한 자, 절대자에 대한 대책없는 광신은 히틀러를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만일 히틀러가 독일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비슷한 부류의 정치인을 자신의 구세주로 잡고 똑같은 대중 선동책을 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나치당과 히틀러의 정권 획득 과정에서 괴벨스의 신념이 하나씩 꺾여가는 과정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꾸던 사회주의자 청년 괴벨스는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지 않게 히틀러가 온건 보수층, 부르주아들과 타협해가는 과정에 거부감을 가졌다. 하지만 '총통의 무오류'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괴벨스는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혹은 이번에만 한시적으로, 또 다르게는 총통이 옳다고 생각하기때문에 자신의 신념을 하나 하나 꺾어가며 히틀러와 나치의 정권 획득의 길에 몸을 던졌다. 이는 비단 히틀러와 괴벨스의 관계뿐만이 아니다. 히틀러와 나치당을 자신의 입맛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 온건 보수층, 근본적 사회 변혁을 꿈꾸던 사회주의자들(나치당의 이름에 국가사회주의라는 말이 들어감을 기억하라), 아리아인의 절대적 우월성을 믿어 의심치 않던 쇼비니스트들, 이들을 모두 통합해 낸 건 결국 정권 획득을 위해서라면 내적 모순에는 눈도 주지 않고 서로 결합할 수 없는 것들을 외견상 결합시키고, 본래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결속시킴으로서 폭넓은 기반을 얻어낸(p. 407) 나치당이었고 그 중심에는 히틀러가 있었다. 8장 말미에서 저자가 지적한 바 대로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은 당의 정강 정책이 아니라 오로지 인물을 통해 조정(p. 408)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정치 행위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적 가치판단의 준거가 사회구조와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에 근거하지 않고 특정 인물에 전적으로 귀속될 때, 본질상 통합될 수 없는 요소들이 통합되어있는듯한 착각을 사회 구성원들에게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착각으로 몰린 힘이 한쪽으로 쏠릴 때, 어떤 파국이 일어나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괴벨스의 대중 선동 방법을 반면교사삼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선전 선동 방법의 핵심을 줄여 말하면 '사태 단순화를 통한 범인 만들기와 때려잡기'로 쓸 수 있을 것이다. 국제/국내 정치와 사회/경제 및 지역 사정이 뒤žg혀 복잡다단한 사회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는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 대신 매우 간명하고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주제(p. 181)로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그 원인을 찾는 대신, 범인을 찾는다. 그 범인이 바로 '유태인'이었다. 괴벨스는 이 연결고리를 통해 자신의 내적 모순을 상당수 스스로 해결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꾸던 한때의 사회주의 열혈 청년은 뒤늦게나마 마르크스 = 유태인, 따라서 공산주의는 유태인의 음모라는 가공할만한 공식을 도출해내며, 고리대금업 등 상업에 종사하는 유태인을 곧 물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응시킨다. 그리고 특유의 강력한 연설 능력으로 이를 전파해낸다. 좀 더 생각해 본다면, 반세기 전보다 더욱 더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사태를 단순화시키고 범인을 찾는 정치적 설명이 타당할 리가 없다. 사태를 단순화시키고 정치와 경제, 사회를 이분화하는  정치적 구호를 지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파시즘'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도처에 난무할 때가 없다. 황우석 사태에서 보듯 '국익'이란 말 앞에서 반대 의견을 허용치 않는 살벌한 사회 분위기가 파시즘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는 지적도, 현실적 동력 없는 대다수 키보드 워리어의 광분에 지나지 않는 행위를 함부로 파시즘이라 딱지 붙이는 건 과도하다는 지적도 있다. 후자의 지적대로, 극단적 테러가 횡횡하는 엄밀한 정의에서의 파시즘과는 아직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언행의 상당 부분은 파시즘 기운이 번져 가는 과정과 닮아 있는 것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독일 파시즘의 한가운데 서 있던 남자를 중심으로 20세기 초반의 독일과 나치의 역사를 서술한 이 책은 도대체 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가닥을 잡게 해 준다는 데 현대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통합할 수 없는 것들을 통합하는 것 처럼 착각하게 하는 인물 중심의 정치행위의 위험성과 복잡다단한 사회 문제를 간단한 것 처럼 정리해 내고 적을 상정하는 단순함의 위험성, 이를 반세기 전 실제 사례로 읽어낸 것 만으로도, 무미건조한 르포 형식으로 천 페이지 가량을 읽어낸 건 헛수고가 아니었다.

 

덧붙여_이 책의 4장 ~ 8장은 낮선 고유명사와 사건이 지루하게 나열되지만 파시즘의 정권 획득 과정이 구체적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몇 번이고 정독할 필요성이 있다. 성이든 집이든 파시즘 체제든 구축하긴 어려워도 허물어지는건 금방인 법, 그래서 9장 이후, 특히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에는 속도감 있는 독서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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