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한길그레이트북스 26
에드문트 후설 지음, 이종훈 옮김 / 한길사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사는 돈은 아끼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나는 가난하다. 그래서 빌려본다. 세 권에 열흘기한이라 외려 촉박한 게 집중이 잘되는 장점도 있다. 주로 소설책 한권에 인문서적 두 권을 빌리는데 이번에 빌린 게 요 책이었다. 일천한 독서편력인바, 맥락은 제대로 잡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책 리뷰까지 감히 쓰는 걸로 봐서 얼마만큼 인상 깊었나보다.

 




우선 저자인 에드몬드 후설에 대해 간략히 생각해보자. 그는 유태인계 수학자였다고 한다. 녹록찮은 시대에 태어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사상가로서 일관한 그의 일생은 어쩐지 사진 속 꼬장꼬장한 눈빛으로도 알아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가 창시한 현상학이란 철학 사조는 후대의 여러 철인과 문인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분분이 논쟁의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길고도 형이상학적인 문체는 힘들어 죽겠고, 학문의 위기에 대한 진단만 했지, 그에 따른 처방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혹자는 ‘실천이 배제된 형이상학’ 이라느니 ‘브루주아적 플라톤주의’ 라는 말까지도 해댔다고.

 

하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의외로 간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도해해보자.

 

우리는 보통 사물을 관찰할 때 경험과 사고에 의거해 판단한다. 우리가 배워왔던 지식과 그로 인한 시선덕에 우리는 관찰대상을 특정한 시각으로 판단하게 되는데, 후설은 그걸 거부하라는 성토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가 학습을 통해 얻은 판단기준, 나아가 시대적 환경, 문화적 풍토까지 모조리 삭제하고 어떤 의식도 침범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물을 관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걸 선험적, 원본적 시선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텅 비어진 시선을 준비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가보다. 그는 이 부분을 적을 때 ‘상태의 변화를 통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한 표현은 ‘선험적 시선’을 갖는 건 능동적인 노력보다 수동적인 기다림으로 가능하다는 신비주의적인 뉘앙스까지 준다.

 

어쨌든, 그런 상태가 되면 사물에 대해 우리는 본질적인 통찰을 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런 상태가 되는 계기를 그는 노에시스적 계기라고 하는데, 이 노에시스적 계기로 인해 우리는 관찰 대상의 기저에 존재하는 본질(핵)을 느낄 수 있다. 바로 이 본질(핵)을 드러내는 현상학적 양상을 노에마라고 한다. 고로 노에시스적 계기로 사물을 관찰하면 노에마적 현상이 보이고, 그 노에마적 현상은 사물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말이올씨다.

 

노에시스-노에마적 통찰은 이제 어떠한 ‘학적인’ 영역과도 닿아있지 않은 순수하게 독립적인 사유장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사유장에는 하나의 초월적인 ‘확신’이 상존하고 있다. 나아가 그 ‘확신’은 도크사(믿음)적 변양을 겪게 되며, 도크사적 변양과 더불어 우리의 의식 속에는 하나의 기준(사상)이 확고히 자리 잡힌다.

 

그 절대적 기준으로서만이 모든 것들은 비로소 본질파악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본질파악이라 함은 위에서 말한 도크사적기준으로 해석된 사물의 본질(핵)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초월적 판단기준으로 나온 모든 결과물은 기존의-특히 심리학과 논리학을 공격하고 있다- 불완전한 사상과는 다른, 그 자체로 완전한 창조적 결과물이 될 것이라는 결론이다.

 

그나마 쉽고 간략하게 말한다고 했는데, 어째 내가 다시 읽어봐도 모르겠다.

자, 사과가 있다.

당신은 사과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가.

빨갛다? 맛있다? 농약? 페리오 치약? 과수원 길?.......

사고는 무한정 뻗어간다. 사과라는 개체 하나에 우리는 무한한 연상을 시도할 수 있다.

모든 시인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사과를 보고 연상되는 그 모든 것들에 괄호를 쳐보자.

그런 모든 것들은 이제 당신의 지각 속에 ‘없다.’

그리고 나서 다시 사과를 보자.

이러한 낯선 시선을 갖추는 것을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했다.

그런 후에 얻을 수 있는 본질적인 통찰은 사물의 핵에 맞닿아있다.

시선을 갖춘 후엔 어딜 둘러보나, 눈에 잡히는 관찰대상은 확고한 하나의 지향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그 지향성에 의거해 다시 사물을 재현전화 시킬 때에 우리는 새로운 학적인 노적가리를 길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후설을 읽으며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토마스 아 켐피스 같은 관상가들의 저서와 너무나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철학적인 반성을 위해 저서에 ‘신’을 언급하는 걸 절제했지만, 내 기억으론 단 한 번 튀어나왔다. 

우리가 선험적 종합적 정립태도를 갖게 되면, 비로소 자아가 사물 속에 흘러들어가게 된다. 그때 우리는 ‘기분 좋은 느낌’을 얻게 되는데, 그와 동시에 우리는 신적인 초월성과도 비슷한 무엇을 깨닫게 된다는 말을.....뭐, 한..거 같다. 

이성으로서 그 현혹에 대항해야 한다는 첨언 또한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나 더.

그의 시선은 모든 예술가가 목말라하는 시선과도 흡사하다. 사물 그 자체를 판단중지하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미 그 설명만으로도 예술가들에겐 너무 달콤한 말인 것이다.

 

끝까지 읽고 나서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이 책은 아무래도 철학의 형식을 빌린 자기고백인 것 같다. 이 작자는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해야 이야기가 풀리는 보통의 이야기꾼들과 달리,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강한 선험적-통합적 본질을 느꼈구나.

 

이 책을 읽으며, 다른 건 몰라도, 이처럼 순수한 자세, 그 자체로서 보존된 철학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왠지 따뜻해졌다.

 

이제 하이데거를 읽어봐야겠다. 그의 제자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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