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시간 -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
토마스 기르스트 지음, 이덕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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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을 함유한 오늘날의 여유

 

 바쁘다는 말은 훈장이다.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많으면 뿌듯하다. 취미생활이 다양하면 또 멋져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틈도 없고 짬도 나지 않는 일상 덕분에 여유에 목 마른 것이 사람이다. 슬쩍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니까, ‘쉬고 싶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쉬고 있다고 말하기는 창피해진다. 여유를 주장하는 건 용기있으면서도 무모하고, 눈치 보이는 일이 되었다. 요즘의 여유를 병에 담아 판매한다면, 아무래도 제품설명란에는 죄책감 함유량이 가장 높지 않을까.


 요새 보니 직장인, 학생 구분 없이 할일이 많은 사람들은 플래너에 한 시간, 삼십 분 단위로 칸을 쪼개 계획을 적는다. 일 년 짜리 달력에서 가장 작은 단위인 하루마저 더 잘게 나누어야 한다니. 남이 하는 건 나도 해야 불안감을 덜 수 있기 때문에 따라해보았다만, 오늘의 할 일에서 한두 개라도 달성하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열심히 사는 남들과 게으른 나를 비교하게 된다. 이쯤되면 최종 목적지는 뿌옇게 흐려지고, 이미 완벽한 남들을 따라가기엔 난 너무 부족한 건 아닌지, 이제야 시작해봤자 그만큼 따라가는 게 가능할지, 결국엔 그만큼 시간을 들였는데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면? 부정적인 자아성찰로 시간을 허비하며 목표를 미루다가 마침내 계획 자체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아니, 분명 누구는 이렇게 해냈고 또 누구는 저렇게 성공했다는데, 정말 꾸준한 노력만으로 대단한 무언가를 탄생할 수 있는 걸까? 그들에게 다른 특별함이 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의심하는 사이, 토마스 기르스트는 인류의 문화사에서 시간으로 활약한 모든 시간을 책 한 권에 수집했다. 장기간에 걸쳐 진행했던, 심지어 지금도 여전히 완성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여러 예술 작품과 의미심장한 실험들부터,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애초에 시간을 들일 수도 없는 너무 대단한 성과가 아닌가 시무룩할 때쯤 인내와 꾸준함만으로 위대한 결과를 빚어낸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소개한다. 개인의 사색과 느림,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들을 말하면서, 그는 크고 작은 이유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을 기피하게 된 현대인들에게 안정을 심어준다.

 

우리는 영원히 미완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야망이나 호기심, 헌신적 태도를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궁극적으로는 무력함을 깨닫는 것은 완벽함에 대한 강박이나 어떤 일을 끝내야 한다는 절대적 필요성에서 비롯된 압박을 덜어 준다. 그렇다고 기한을 어기거나 합의된 목표와 약속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지속적으로 최선을 다하되 우리의 나약함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너무 깐깐하게 따지지 말고 어떤 것은 그냥 그대로 두자.’

 

아주 오래전부터 천천히 걸어온 모든 시간

 

여행을 떠나기 전날, 필요한 물건을 가방에 급하게 쑤셔 놓은 모습을 떠올려본다. 시간을 내어 차곡차곡 크기와 부피에 맞게 정리하면 생각보다 여유 있게 짐을 챙길 수 있고, 여행길에서 꺼내어 쓸 때도 훨씬 편리할 것이다. 일상도 그런 게 아닐까? 생의 다양한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그때그때 충분한 시간을 들인다면 넉넉한 여유와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그간 잊고 있었을 뿐, 정말 멋진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천천히 공들여 왔다는 것을 나는 사실 알고 있었다.

 

'자기 내부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를 흡수할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충분한 시간을 내어 줄 때 우리는 비로소 배움을 통한 이익을 누릴 수 있다. 당신이 가장 가치를 두는 일에 매진할 때, 거기서 잃은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생겨나며 대부분의 문제와 도전은 다루기 쉬운, 해결할 수 있는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 두 문장으로 오늘, 지금껏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라는 이유로 선택하기를 망설여 왔던 일을 드디어 실천하려 한다.

 

우리는 영원히 미완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야망이나 호기심, 헌신적 태도를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궁극적으로는 무력함을 깨닫는 것은 완벽함에 대한 강박이나 어떤 일을 끝내야 한다는 절대적 필요성에서 비롯된 압박을 덜어 준다. 그렇다고 기한을 어기거나 합의된 목표와 약속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지속적으로 최선을 다하되 우리의 나약함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너무 깐깐하게 따지지 말고 어떤 것은 그냥 그대로 두자.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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