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온은 항상 사진기를 들고 다닌다. 그리고 '시간'과 '거리'는 그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묻는다.
"거리가 어떻게 보이는가?" 단순 솔직한 질문이다. 거리는 공간 없는 내면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의
가장자리까지 뻗어 있다. 그건 빛에 의존하다. (p.64)
시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p.128)
그날 그는 침대에 누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꼬리가 벽에 닿는
달빛 없는 수족관 속에서
떠다니는 고래들을 생각했다 --- 시간의 끔찍한 비탈의
그들 자리에서
자신처럼 살아 있는 고래들. 시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나요? (p.144)
'거리'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p.152)
시간은 덩어리이자, 움직임에 부여된 의미이다. 거리 또한 늘 변하고 우리는 그 사이에서 서로를 지켜볼 뿐이다. 사진은 빛이 없다면 찍을 수 없다. 그리고 빛의 움직임을 찍기 위해선 장시간 동안 카메라 셔터를 열고 있어야 한다.
재밌구나. 네가 아기였을 때 불면증이 있었는데
기억나니? 밤에 네 방에 들어가 보면 넌 아기침대에 똑바로 누워 있었어.
눈을 크게 뜨고 어둠 속을 바라보면서 말이야. 울지도 않고 그러고 있었지. (p.60)
신화에서 영웅은 타고난다. 시련은 영웅을 더 강하게 만드는 과정에 불과할 뿐, 그의 영웅성은 천성적인 것이다. 게리온도 타고난 영웅이었으나 스스로 깨달아야 했다. 자신 안의 영웅성을 깨닫고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을 화산으로 데려갔지만, 그를 화산 속으로 진정 인도한 건 '앙카시'였다.
이건 앙카시를 위한 거야. 그는 아래로 멀어져가는 땅에 대고 외친다.
이건 우리의 아름다움의 기억이다.
그는 태고의 눈에서 모든 광자들을 쏟아내는 이칸티카스의 흙으로 된 심장을 내려다보며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는다.
사진 제목은 '사람들이 간직하는 유일한 비밀.' (p.242)
게리온은 앙카시를 만나 숭고한 여정의 시작이자 끝을 향해 간다.
앙카시는 불을 바라본다.
우린 경이로운 존재야.
게리온은 생각한다. 우린 불의 이웃이야.
서로 팔을 맞대고,
얼굴엔 불멸을 담고, 밤을 등지고 나란히 서 있는 그들을 향해
시간이 돌진하고 있다. (p.244)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괴물은, 나를 고유하게 만드는 동시에 외롭게 만든다. 사랑하는 존재와의 거리를 깨닫게 만든다. 하지만 비록 닿을 수 없는 존재일 지라도, 우린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볼 수 있다. 그렇기에 눈을 감는다는 건 위험하다. '실체에 대한 열정'으로 앤 카슨은 스테시코로스의 입을 빌려 말한다. '보는 것은 하나의 본질'이라고.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은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었다. 불완전한 파피루스 단편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다시 재창작한 스테시코로스의 단편들을 기반으로 한 '빨강의 자서전'도 챕터 간에 단절된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책을 덮을 때가 되면 격리된 듯한 챕터들이 실은 견고히 이어져 하나의 결론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파편을 하나씩 모으다 보니, 결국 인상주의 화풍의 그림으로 완성된 기분이랄까.. 무엇보다 <시로 쓴 소설>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한 문장 한 문장이 품고 있는 서정적 아름다움이 생생한 이미지와 결부되어 더 깊은 인상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