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윤이형 외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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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광장 #워크룸프레스 #국립현대미술관 #윤이형 #김혜진 #이장욱 #김초엽 #박솔뫼 #이상우 #김사과


<광장>은 국립현대미술관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광장:미술과 사회 1900~2019』 중 동시대 파트에 해당하는 3부 전시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다만 전시의 기록물인 도록의 형태가 아니라, 전시에 참여하는 형식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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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투쟁과 촛불 집회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광장’은 더 이상 장소로서의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광장’은 좀 더 확장되어 그 역사성과 시의성을 포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7명의 작가들은 ‘광장’이라는 동일한 두 글자의 제목을 가지고 다양한 광장의 의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는 윤이형, 김혜진, 이장욱, 김초엽의 소설들이 좋았다. 다른 세 작가의 소설들은 조금 어려웠다. 이미지, 관념, 상징으로서의 광장에 대한 해석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세세히 읽어봐야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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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형 작가의 ‘광장’은 ‘멀티플렉스화’ 될 광장을 앞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야외의 광장이 쇼핑몰, 식당, 휴식 공간, 유흥 시설 등이 들어찬 빌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늑한 ‘투쟁’을 위해 냉/난방이 되고 각각의 개별적인 스크린까지 설치되어 있는 광장은 언뜻 보기에 편리성이 보장된 장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에 문제의식을 느낀 만화가들이 한 카톡방에 모인다. 윤이형의 <광장>은 그 카톡방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정치적 견해로 갈등을 빚고 와해되기도 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 어쩌면 그들은 연대조차도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들을 마주한다. 서로 대면하지 않는 온라인의 공간에서 연대의 논의는 점차 흐려지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는 오프라인에서 다시 모아진다. ‘예나’는 연대를 모의한 다른 만화가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그간의 고민들을 고백한다. 진솔한 마음이 닿았을까, 멀어졌던 투쟁은 다시 ‘해볼 만한’ 범위 속으로 가까워진 듯 느껴진다. 

칸칸이 벽으로 나누어진 광장에서 ‘투쟁’이란 가능할까. 현재의 광장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은 서로 분리하고 분리되어진다. 서로 마음이 맞는,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맺는 연대는 어쩌면 멀티플렉스 빌딩 속 여러 칸들 중 하나가 아닐까. ‘광장’의 장소성은 구별되어진 연대들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킨다. 숨겨져 있던 혐오를 밝혀내고, 투명해진 사람들이 선명해진다. 칸칸이 나누어진 벽 속에서라면 ‘예나’의 장애는 투명해질 것이다. 과장의 장소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광장을 하나의 빌딩으로 건설하는 소설의 설정도 독특했다. 어떤 논의 속 개개인들의 삶에 집중하는 윤이형 작가의 섬세한 관점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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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의 <광장>은 SF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 시지각 장애를 가지고 있는 ‘모그’들은 몸 속 칩을 통해 추상적으로 세계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히 차별은 존재한다. <광장>은 ‘마리’와 모그들이 벌인 ‘페스티벌 사건’ 이후, ‘마리’에게 춤을 가르쳐준 ‘나’의 관점으로 과거를 되짚는다. ‘나’는 ‘마리’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경계 사이에서 흔들린다. 모그들끼리 추상적인 세계 속에서 서로 동등한 인격체로서 동등한 층위의 소통을 도모하는 방식은 흥미로웠다.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었지만, 현재의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하나 같지 않지만 절대적으로 동등한 층위의 목소리들. 김초엽 작가 특유의 SF/판타지적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상상이 해낼 수 있는 어떤 힘과 방향성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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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꾸만 주위를 돌아보게 됐다. 완전히 혼자일 수 없었다. 광장에서도 사람들은 옆 사람을 바라본다. 옆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고, 그 사람이 자신만큼 뜨거운 마음이 아니면 실망하고, 그런 실망감을 전해 들으면 상처받는다. 그러면서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느끼고 생각한다. 미움에서조차 무언가를 배우기도 한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바보 같은 정도로 연약하면서도 복잡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람인 것 같았다.” (p.32)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저를 대신해 거기서 싸우고 있을 거잖아요. 저보다 거동이 불편한데도 종종 광장에 나가는 분들도 계시고요.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있지만 거기 휠체어를 탔거나 발달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몸은 거의 나오지 않잖아요. 카페 규모의 작은 공간들로 닫힌 광장을 잘게 쪼개고, 장애인 인권에 대해서는 닫힌 공간에서만 말할 수 있게 된다면, 비장애인들은 아마 우리를 보고 들을 기회가 더 적어지겠죠. 보기 싫은 몸, 듣기 불편한 말들은 점점 더 구석으로 몰리고 갇혀서 작아지다가 치워질 거예요. 하나의 광장이 변하면 다른 광장들도 비슷하게 변해가지 않을까요. 예쁘고 비싸고 세련된 공간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주목받을 수 없을 거예요.” (p.42)


“사람들은 모그들의 존재를 갑작스럽게 알아차렸고, 그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일단 알게 된 이후로는 돌이킬 수 없었다.” (p.150)


+) 표지가 인상적이다. 앞표지에는 ‘광’ 자와 ‘장’ 자가 하나의 ‘ㅇ’을 공유하며 연결되어있다. 작가의 이름이나 부차적인 설명 없이, 단순하게 ‘광장’이라는 두 글자만 있다. 말 그대로 ‘광장’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는 의지가 확고하게 드러나 있다. 굵직하고 직설적인 형태의 글자가 눈에 띄고, 흑백의 대비가 심플하면서도 명확하다. 양장본으로 되어있는데, 겉표지는 부드러운 캔버스 질감이다. 표지를 펼치면 바로 보이는 오렌지빛 속지도 인상적이다. 책 속의 본문은 일반적인 형식보다는 핸드폰의 화면으로 글자들을 보는 것 같다. 한 줄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적어 읽기 편했다. 단순하고 심플한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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