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당신의 작은 공항
안바다 지음 / 푸른숲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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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시절
'빈곤론'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교수님은 질문을 했다.
가난이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노잼 대답만 나오다가
한 아저씨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렇게 많고 많은 집 중에
송곳하나 찌를만한 내 땅이 없다는게
가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이란 곳도 정좀 들듯하면 이사만 하는 전세살이만 하고 있네요."

순간 생각했다.
'가난의 정의도 촌철살인스럽게 정리해주셨지만,
집에 정이란 게 들수 있는걸까?'

집이란 곳은
그저 퇴근 후 잠들고, 씻고, 대소변 보는 곳이다.
서울에서의 집이란
마당이 있지 않는 한
편의와 활력을 근거리에서 볼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여관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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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집이란 공간에 존재하는
현관, 거실, 의자,침대, 전등, 주방, 창고, 서재, 베란다, 거울, 냉장고, 발코니 등에 작가만의 스토리를 통해 의미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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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장을 덮고 나니,
눈높이를 움직여서 집안 곳곳을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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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1-183 냉장고]
주거공간에 있는 가전제품 중 심장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사물은 흔치 않다.

15년 동안 우리는 매일 냉장고 문을 여닫았다. 수없이 들락거리는 내 손과 아내의 손을 조용히 받아내던 냉장고. 늦은 밤 어둠 속에서 주황빛을 네모나게 밝혀주던 냉장고.

쓸쓸한 날은 꼭 꺼내 먹고 싶은 무언가가 없어도 차갑지만 따뜻한 빛 앞에 한동안 서있곤 했다.

그들은 조용히 눍어가며 버려진다.
사물들에게 입이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도 당실들과 다르지 않다고, 그간 무심한 표정으로 버텨왔지만 실은 우리도 당신들처럼 때론 슬프고 때론 아프다고. 그래서 우리 집 냉장고도 그날 밤 차게 울었던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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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8-200 베란다]
초여름 해개 지고 있었고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에선 초저녁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맞은편에 앉으며 캔맥주를 따서 친구에게 주었다.

친구는 직장을 그만두고 시작한 첫 번째 교육사업에 실패했다. 평범한 직장인이 평생 벌어서 갚기 쉽지 않은 액수의 자금을 잃었다.

'잘될거야'라는 성의 없는 위로를 전하고 시지 않았지만 다시 그말로 되돌아 갈수 밖에 없었다.
잘될 것이라고 말한들 상황이 잘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괜찮다고 위로한들 그가 괜찮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상심과 상처를 해결해줄 정답이 있어서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또 다른 슬픔과 상처를 지금의 슬픔과 상처를 견디며 괜찮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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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2 에필로그]
단기간의 경제성장과 도시화가 만들어낸 결과겠지만 내밀함이 부재한 아파트의 대대적인 보급은 어쩌면 소비사회의 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만자고, 일하고, 소비하기 위해 배터리를 충전하는 곳으로 주거공간을 전락시키는 어떤 전략.

먹고 놀고 쓰고 공감하고 즐기고 읽고 듣고 공부하고 파티를 열고 사랑하는 일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집밖에서 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해지는 어떤 전략.

이 총체적인 전략을 통해 아파트에 부재한 내밀함을 풍족한 외부 소비 공간에서 끝없이 소비하여 대체하는 것이 전 사회적 구성원의 비계획적 계획은 아니었을까.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경제 발전은 집의 내밀함과 추억의 내밀함을 잃고 얻은 대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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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집안을 꾸미고 싶은 충동이 든다.
겨울을 맞이해서
가족들이 더욱 따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게
거실에 러그를 깔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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