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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트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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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觸)이 쌓이면 수(受)가 쌓이고, 촉이 멸하면 수가 사라진다

열반은 연기하고 있는 모든 법은 공성(空性)이라는 것을 깨달아 마음속에 형성된 망념이 사라진 경지일 뿐 생사를 떠나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4성제의 인과관계가 연기관계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원인이 되는 5온의 집(集)이 있는 곳에 그 결과로 괴로움이 있고, 5온이 집기(集起)할 때 그 결과로 괴로움이 집기하며, 5온의 멸이 있는 곳에 그 결과로 괴로움의 멸이 있고, 5온이 멸할 때 그 결과로 괴로움도 함께 멸한다. 따라서 인(因)이 되는 8정도에 과(果)가 되는 멸성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집성제에 고성제의 내용이 있는 것과 같이 지극히 당연한 일로써 이것은 모순도 아니고 순환론도 아니다

따라서 정견의 내용이 멸성제에 대한 여실한 앎이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들의 주장은 열반을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떤 것, 즉 열반을 유소득(有所得)의 경지로 오해한 것이다

4성제(四聖諦)는 인과관계를 이루고 있다. 고성제(苦聖諦)는 과(果)이고 집성제는 인(因)이며, 멸성제는 과(果)이고 도성제는 인(因)이다. 그런데 멸성제의 인(因)이 되는 도성제, 즉 8정도의 첫 지(支)인 정견(正見)의 내용이 4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설명된 점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문제를 제기한다

뿐만 아니라, 붓다는 수행이란 ‘목표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 바르게 실천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고(苦)와 집(集)의 순서는 현실의 괴로움을 자각할 때에 그 원인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멸(滅)과 도(道)의 순서는 수행의 목적을 바르게 알아야 올바른 수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꿔 말하면, 고성제는 집성제를 깨닫도록 하는 원인이고, 멸성제는 도성제를 실천하게 하는 원인이다

욕탐을 축으로 존재가능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연기하는 법계에서 체험된 의식(과거), 체험하고자 하는 의식(미래), 체험하고 있는 의식(현재)을 욕탐으로 취착함으로써 5취온이라는 인간실존이 집기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고집성제(苦集聖諦)이다

이와 같이 집성제(集聖諦)는 세간의 존재방식과 존재원인을 밝혀 출세간(出世間)으로의 해탈 가능성, 즉 괴로운 인간실존의 근원을 멸진하여 새로운 존재방식으로의 전환이 가능함을 보여 준다

끊임없이 존재가능성을 추구하면서 죽음 앞에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는 인간실존의 원인을 여실하게 알아서 괴로움의 근본을 없애야만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집성제(苦集聖諦)는 바로 이와 같은 인간실존의 원인과 구조적 실상을 보여 주는 진리다

‘세존이시여, 분별 음식[識食]은 무엇을 키우는 음식입니까?’라고 묻는 것이 온당한 질문이오.

‘세존이시여, 무엇에 의존하여 대상접촉[觸]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온당한 질문이오.

‘세존이시여, 무엇에 의존하여 취(取)가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온당한 질문이오.

고성제(苦聖諦)는 소위 8고(八苦)로 칭해지는 생(生), 노(老), 병(病), 사(死),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약오음성고(略五陰盛苦)로 설해지고04 있다

현재의 삶[現法] 가운데서 도(道)를 몸소 증득할 수 있으며

붓다는 여러 가지 중요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으나, 정작 진리(sacca)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4성제이며

6입처(六入處)도 6입처[苦]와 6입처의 집(集), 6입처의 멸(滅)과 6입처의 멸에 이르는 길[道]의 구조로 설해지고 있고

5온(五蘊)도 5온[苦]과 5온의 집(集), 그리고 5온의 멸(滅)과 5온의 멸에 이르는 길[道]의 구조로 설해지고 있다

인식론의 고찰에서는 9차제정(九次第定)을 통해 진리에 대한 보편타당한 인식이 가능함을 살펴보았고, 존재론의 고찰에서는 사물의 본질이 마음에서 연기(緣起)한 것임을 살펴보았다. 이제 열반은 어떤 것이며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를 살펴 볼 차례이다.


붓다가 추구한 가치는 평온과 사물의 본질에 대한 완벽한 이해[勝智; abhinn?]와 보편타당한 인식[覺], 그리고 모든 괴로움이 멸진한 행복[涅槃]이다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 행하는 수행을 붓다는 범행(梵行; Brahmacariya)이라고 부른다

가치론은 필연적으로 정당한 인식론과 존재론을 요구한다. 바꿔 말하면, 정견(正見)이 전제되지 않는 가치의 추구는 무의미하다.

서양철학에서 저마다 다른 가치론이 대립하고 있는 까닭은 인식론과 존재론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의미한 명제를 가지고 가치의 문제를 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책상이다.’라는 사실판단의 보다 본질적인 판단은 ‘이것은 책을 놓고 보기에 적당한 것이다.’라는 가치판단이다.

꽃은 우리의 욕구와 상관없이 자연계에 존재하는 사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에게 꽃이 인식되는 것은 꽃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으키는 관심에 따라 장미는 다른 내용으로 인식된다. 식물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보면 줄기는 외피와 내피로 구성된 것으로 인식되고, 물리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보면 줄기는 분자와 원자로 인식된다. 이와 같이 모든 판단에는 우리의 욕구와 관심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모든 판단은 가치판단이다.

사실판단이건 가치판단이건, 그 대상이 우리의 외부에 실재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추구되는 철학은 그 자체로서 허구이고 모순이다

중도에서는 존재와 인식 그리고 가치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진리의 인식은 단순한 사실의 인식이 아니라 가치의 인식이며, 이러한 인식을 통해 드러난 존재의 실상은 우리에게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를 보여 준다.

붓다의 중도철학(中道哲學)은 가치론에 인식론과 존재론이 함축되며, 4성제(四聖諦)는 바로 인식론과 가치론을 함축하는 붓다의 가치론이다.

왜 꽃에 대해서는 향기와 형태로 가치를 정하고, 책상에 대해서는 쓸모로 가치를 정하는 것일까? 우리는 꽃에 대해서는 향기와 아름다움을 구하고, 책상에 대해서는 쓸모를 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가치판단에는 우리의 욕구가 개입된다

욕구가 개입된다는 측면에서 보면 사실판단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책상이다.’라는 판단은 얼른 보면 사실판단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가치판단이다

서양철학에서는 이 세계에 ‘사실판단의 대상’과 ‘가치판단의 대상’이 어떤 형태로든 주어져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가치판단의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윤리학 또는 가치론이 학문으로 성립한다

현대의 윤리학자 무어(G. E. Moor)는 종래의 윤리학설을 형이상학적 윤리설, 자연주의적 윤리설, 직각론적(直覺論的) 윤리설로 분류한다

고전윤리학에서는 크게 ‘목적주의(目的主義) 윤리설(倫理說)’과 ‘법칙주의(法則主義) 윤리설(倫理說)’의 두 진영으로 나눈다.

선악의 판단은 행위의 결과를 보고 판단해야 하느냐, 동기를 보고 판단해야 하느냐에 따라 결과주의(結果主義)와 동기주의(動機主義)가 대립하기도 한다

가장 보편적인 행위의 당위성을 요구하는 윤리학 그 자체가 어떤 당위성도 없다고 할 만큼 현대는 가치의 혼돈상태이다. 현대뿐만 아니라 중세 이후 근세의 서구는 혼돈의 연속으로 생각되며, 그 결과 서구의 사상과 문화가 지배하는 현대사회는 가치의 개인주의시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여러 윤리학설은 같은 입장에서도 학자에 따라서 주장하는 내용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실로 윤리학설은 그 수가 사람의 수만큼 많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 P4

서양철학에서 가치론은 존재론과 별개의 영역이다. 즉, 우리의 판단에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엄연하게 구분된다고 보는 것이 서양철학의 입장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판단의 대상이 실재한다는 것도 전술한 바와 같이 서양철학의 전제이다.

이와는 달리, 모든 존재는 우리의 마음에서 연기한 것으로 보는 것이 붓다의 입장이고, 사실판단의 대상이건 가치판단의 대상이건,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를 논하는 것 자체가 허구이고 모순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들 모순된 논의에서 벗어난 것이 붓다의 중도(中道) 철학이다

인간행위의 보편적 당위성을 추구하는 문제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계속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식(識)은 6식신(六識身)으로 설명된다. 6식신(六識身)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사유함으로써 발생한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의 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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