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데 마음 간다는 그 말, - 윤구병이 곱씹은 불교
윤구병 지음 / 호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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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데 마음 간다는 그 말, 」을 읽고


주순중

  

윤구병 선생님과는 꽤 오래된 인연이다. 1983년에 이오덕 선생님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뜻을 같이 하는 선생님들이 모여 ‘한국교육글쓰기연구회’를 만들었을 때부터 또, 내가 「보리출판사」에서 책을 펴낸 일이 있는데 그런 저런 일로 해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정작 윤 선생님 글은 거의 읽은 게 없다. 글을 어렵게 쓰시는 건 아닌데 읽기가 편하지 않다. 그래서 처음 조금 읽다가 마지막 줄로 그냥 지나고 만다. 

  이번에 책을 받고 썩 내키지 않아 표지도 제대로 보지 않고 그냥 두었다가 준사람 마음을 생각해 일단 읽어보기로 했다. 읽어 보니 내가 믿고 있는 불교 이야기였다. 윤선생님은 불교 어떻게 보고, 어떻게 해석하시나? 하는 궁금증으로 해서 끝까지 읽었다. 한번 읽고 말 글이 아니어서 몇 번씩 되짚어가며 읽고 있다. 

  선생님이 왜 이렇게 불교에 대해 애착과 집착(?)을 보이시나 했더니 내용 가운데 3번이나 출가를 감행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한다. 그러니 책을 내실만도 하다. <운수행각, 멋지다>는 글이 있는데 윤 선생님도 어떤 스님과 견주어도 서럽지 않을 운수행각을 하시고 계신다. 운수행각는 그동안 절집 안에서 참구한 것을 점검하러 길을 나서는 것이다. 내가 보기로는 윤 선생님의 운수행각이 멋지지만은 않은 것 같다. 윤 선생님답게 나간다 했더니 독자로부터 항의를 받고 글 쓸 의욕이 꺾이기도 하고.      

  불교를 좁게만 생각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세우는 척하며 자기들의 정치이념을 선전 선동’ 한다고 생각한다. 불자만 그런 게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 가운데도 세월호 가족들을 욕하는 걸 보았다. 기독교든 불교든 근본정신은 약자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인데도 말이다. 

  이 글에서 자비에 대한 선생님의 해석은 독특했다. 보통 ‘자애로울 자. 비통할 비’로 해석 하는데 한자를 쪼개어 그 낱자가 담고 있는 뜻으로 풀이하니 그 맛이 상당히 깊다. 

  다른 종교도 그렇지만 불교가 종교로만 살아가려 했다면 일찌감치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종교가 바로 우리들의 삶의 바탕이 되었기에 사람도 살고 종교도 살 수 있었다. 오랫만에 두고두고 읽을 책을 내 주신 호미 출판사와 좋은 글을 써 주신 윤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아쉬운 점은  작은 제목 ‘ 관셈보살’에서 본문에는 모두 ‘관세음보살’로 했는데 제목은 왜 다르게 썼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낯설고 어색하다. 또 ( ) 안에 많은 글들도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됐다. 도움을 주려고 한 일이 방해가 돼서야.


편집자의 변

선생님이 보내 주신 글을 읽고 편집자로서 한마디,“관셈보살”은 입말로 선생님의 아버님이 새벽마다 천수경 읽으실 때 발음 그대로를 둔 것이다. 제목으로 굳이 따지자면 관세음보살을 그리워하는 것도 있겠지만 아버지가 새벽마다 천수경을 읊은 것이 그립기도 한 것이라서 “관세음보살을 그리며” 하지 않고 “관셈보살을 그리며”로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괄호에 설명이 많은 것은 다정하신 윤구병 선생님이 이런저런 노파심이 많아서 글을 읽는 데 행여나 그 뜻이 잘못 전해질까 싶어서 단 것들이 많아서 그렇다. 다음 편집 때는 읽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편집의 묘미를 좀더 살려야겠다. 책을 살뜰히 읽고 글을 보내 주신 주중순 선생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욕망은 결핍의 산물이다. 결핍에는 생리적인 것도 있고 심리적인 것도 있고 사회적인 것도 있다. 이 가운데 생리적 욕망은 모든 생명체가 다 지니고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생존을 이어가려면 끊임없는 물질 대사를 해야 한다. 이 점에서는 식물이나 동물이나 인간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멧돼지가 고구마 밭을 갈아 엎어 버리는 것이나, 새매가 병아리를 채가는 것이나, 호랑이가 개나 염소의 목덜미를 무는 것은 다 이 생리적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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