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도를 사랑한다 - 경주 걸어본다 2
강석경 지음, 김성호 그림 / 난다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스무살에 재수를 하던 시절, 대학교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난(蘭)을 처음 봤는데 물을 주다가 빛깔이 누렇게 변해버린 난초 잎을 두개 가위로 잘라버린 일이 있었다.

난초를 직접 키우시던 교수님 허락 없이 벌인 일이었는데 이걸 왜 잘랐냐는 그분 물음에 '산 것과 죽은 것이 어떻게 같이 있나요?' 하고 되물었었다.

내가 잘라버린 난초잎의 밑둥은 그대로 뿌리가 박혀 있었으나 점점 말라 죽어갔다. 그렇지만 난 아직도 내가 난을 잘랐기 때문에 말라 죽은 건지 아니면 원래 잘랐어도 되는 거였는지 잘 모르겠다.


- 산 자와 죽은 자가 인류의 가족으로 더불어 있다니. 고분들은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이지러지기도 하고 주검은 어느덧 대지로 돌아가 둔덕 같은 자연 자체가 되어 있었다.


강석경의 경주에 관한 에세이집 <이 고도를 사랑한다>의 프롤로그 부분에 나온 문구를 읽다가 문득 생각난 에피소드다.


경주 하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적이 있었다. 4박 5일의 일정동안 불안정한 초여름 날씨를 입증하듯 비다 오다 그치다를 반복했고 차로만 이동하던 덕분에 버스 안에서 내내 잠만 잤다. 차를 세워서 거닐었던 해변가가 문무대왕능인지도 몰랐고 석굴암을 오르던 산길은 틈틈이 내려주던 빗물 때문에 뻘밭이 되어 있어 미끄러지기를 밥 먹듯 하며 기어올랐었다. 열일곱 어린 소녀의 눈에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장소였던 걸지도 모른다.


경주에 거주하며 고즈넉하면서도 잔잔한 일상을 노래하는 강석경은 내가 무심히 넘겨버렸던 풍경을 꼭꼭 밟으며 산책자의 눈으로 훓어내렸다. 또한 해설자의 눈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 꽃가루가 흘러가는 수면을 바라보니 못에는 나무뿐 아니라 하늘도 담겨있다. 천삼백여 년의 유물만이 아니라 천삼백여 년 동아 지고 뜬 해와 달이 드리워 있고 별똥별도 묻혀 있다. 그 세월 동안 태어나고 소멸한 뭇 생명들의 흔적까지 깃들여 있는 듯 한데 수면 위로 불현듯 두 개의 삼층탑이 솟아오르는 환영을 본다. 늠름하고 힘찬 감은사 탑이다. 문무왕이 부처님의 위력을 빌려 왜적의 침략을 막고자 절을 세우다가 돌아가시니 아들인 신문왕이 완성하여 감은사라 이름 짓고 세운 탑이다. p.49

 

내가 자랐던 시골에 가면 어머니는 먹을 걸 거두시느라 분주해 지신다. 허리 디스크 수술로 장해 판정을 받으신 분이 어디서 기운이 펄펄 나는지 뒤꼍의 텃밭으로 앞마당의 채마밭으로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거두어 들이신다.


담벼락에 열려 있던 둥근 호박은 얇게 잘라 말리고 뒤꼍의 텃밭에서 딴 부추로 부추김치를 담그고 채마밭에서 딴 열무로 물김치를 담근다. 그렇게만 해도 어머니와 우리집까지 가져다 한동안 밑반찬으로 잘 먹는다. 누가 뭐래도 직접 기른 작물만큼 몸에 약이 되는 식물은 없을 것이다.


여성 작가가 쓴 에세이라 그런지 <이 고도를 사랑한다>에는 유난히 먹을 거리에 대해 많이 나온다. 젊은 시절 암자에서 지내다 맛을 들였다던 죽순, 고디(다슬기), 교동법주, 영양숯불갈비 등 경상도 음식은 맛 없다는 편견을 여지없이 깨주는 맛깔난 음식들이다. 어딜 가나 먹고 사는 문제가 모든 인간살이의 기본이 되는 것 같다.

먹는 게 그런데 사는 거라고 다를까? 흉물스럽게 올라서고 있는 고층아파트들을 보며 훼손되는 고도를 그래서 작가는 안타까워한다.

 

- 핵무기가 개발되고 과학이 극한으로 치닫는다면 천년 고도도 먼 훗날 죽은 자의 꿈만 남은 유령의 도시가 될까 두렵다. 시간의 강은 이어지는데 다가오는 시대를 어떤 꿈으로 맞아야 할지, 문명에서 잠시 비켜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유목민의 향수에 젖는다. 일설에 따르면 바지는 중앙아시아에서 말을 타기 위해 발명됐다고 한다. p.118


천년고도라는 경주에 깃들어 사는 작가라 그런지 그가 보는 인물열전 또한 남다르다. 영혼의 DNA라고 명명한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뭉치고 오랜 기간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나,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는 누비장 어르신과 무용가 이매방 선생의 일화는 촘촘히 꼭 짜여 소개된 에피소드만큼 흥미진진했다. 오랜 시간 글과 함께 살아온 고수의 눈에 비친 인물은 뭔가 다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경주가 꼭 좋은 점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작가가 묘사한대로 무척 덥고, 조용한 곳이다 보니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다른 이의 일상에 관심이 많다.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게 어찌 보면 다행이라 여긴다던 작가의 일리 있는 감회는 익명성을 좋아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환기를 시켜주는 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에는 '내 근처에 두고 볼 수 있는' 자연이 있어서 좋다고 한다. 급속도로 도시화 되어가고 누가 들어가 살지도 모르는 집을 연이어 짓고 있는 걸 심심찮게 보는 입장에서는 익명성을 포기해서라도 얻어갖고 싶은 게 이런 느림과 근처에 있는 자연일 것이다. 산책의 묘미란 그런 스스로를 깨달아 알아가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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