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관한 짧은 이야기
토미 바이어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복권이 당첨된다면 어떻게 할지, 계산을 뽑아본 적이 있다.

그러다 그만뒀다.

나는 되고 안되고의 확률을 떠나서..복권 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뭔가 될만한 걸 해야지 하는 마음도 있고 돈을 그냥 갖다 버리는 것 같다는 마음도 커서다.

누구는 복권 한장으로 일주일을 행복하게 산다던데..나는 일주일간 행복하고 역시나..하는 마음이 드는 게 더 싫다..

그 상실감..아무리 쥔 적 없는 돈이지만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다.


토미 바이어의 <행복에 관한 짧은 이야기>에는 복권당첨자가 나온다. 620만유로에 당첨된 남자.

복권 당첨을 통보해준 상담원 페리데스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 것을 권한다.

 

하지만 알만은 가장 먼저 아내를 떠올린다. 환자를 진료하고 병원을 꾸려가느라 지친 아내 레기나.

복권 당첨사실을 알리고자 궁리하던 알만은 어처구니 없게도 저녁식사 자리에서 계획했던 크루즈여행을 취소했다는 말로 레기나와 다투게 된다.

 

늘 생각하는 바지만, 사람 말은 항상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아무리 상대방에게 지치고 짜증나더라도.

레기나는 남편 알만에 대한 신뢰가 깨진지 오래다 보니 크루즈여행을 취소한 진짜 이유를 듣지 못했다.

당장 그 한순간 때문에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하는 병원일과 부채에서 놓여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알만 또한 제때에 적절하게 아내에게 복권 당첨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복권에 당첨된 며칠간 알만은 별로 유쾌하게 보낼 수 없었다.

 

친구들을 시험하고, 다툰 후 집을 나와 연락이 끊긴 아내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하루종일 돈을 어디다 쓸 것인가 고민했지만 실제 한 일은 집시들과 거리의 악사들에게 적선을 하고, 모르는 여자에게 돈을 꿔주고, 결국 아내에게 선물하지 못한 아이팟을 샀다.

두 누이들에게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돈을 부치고 BMW를 사서 끌고 다녔지만 아내의 부재를 더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자신에게 사기를 치고 떠나갔으며 공동 당첨자이기도 한 에키에게 찾아갔을 때는 그나마 옛사랑인 클라우디아에게 사실을 알려주고 잠깐의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아내에 대한 신뢰로 클라우디아의 유혹을 뿌리쳤지만 그의 아내는 이미 그를 버린지 오래였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을 때는 어떤 표정이었을지 상상이 갔다.

 

다시 돌아가보자.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하필 날을 잘못 잡은 판다 크루즈의 마케팅실장이 특실이 취소됐다고 연락을 하지 않았다면, 이 때문에 두 부부는 저녁상이 평화로웠을지 모른다.

선물로 사둔 아이팟을 레기나(처음에는 베스페라고 칭했다)에게 선물하고 알만은 이렇게 말하는 거다.

 

'베스페, 이제 고생끝 행복 시작이야~'

 

그랬다면 레기나는 클라우스 베어(나중에 잠깐 등장한다)와의 외도를 끝내고 알만과 꿈에 그리던 여행을 하고 책을 쓰고, 공부하며 살았을까? 아니면 오히려 더 쿨~하게 '그래? 그럼 내가 곁에 더 없어도 되겠네. 우리 헤어지자' 라고 했을까..

 

전체적인 맥락과 그녀의 성격을 볼 때, 돈 때문에 얽매이지는 않으니 분면 후자였을 것 같다.

 

책에서는 알만이 레기나에게 복권 당첨사실을 말하면 돌아올지, 그런 그녀를 신뢰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말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작가가 어쩔수 없는 남자라는 생각이 든 건 그 부분이었다.

 

여자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단 말이쥐..

 

더군다나 예술가적 기질이 있는 한량으로 바빠 죽겠는 마누라가 새벽에 일어나 달그락거리며 출근준비하는대도 퍼자고 있고, 피곤에 절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기절한 듯 침대에 누워있는데 밤새 TV를 보며 낄낄대는 남편의 기척을 들어야 한다면 오히려 복권 당첨되서 돈은 있으니 나는 없어져도 잘 살겠다는 생각 같은 게 더 들었을 것 같다.

 

물론 사람이니 권리주장은 하겠지.

 

재산분할 신청을 했더라도 남편 몫의 빚이 집대출금에 걸려있는 이상 '최소한도의 금액'은 요구하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해본 추측이지만 실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잊어버리도록 하자.

 

좀 냉정하게 보자면 주인공 알만은 복권이 당첨되면서 그의말대로 '유리한 편'에 서 있는 입장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진창으로 밀어넣은 동업자 에키 덕에 큰 돈을 손에 넣었고 멋지게 복수도 했다.

 

다만,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으니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고 아버지를 잃었으며 스카트 게임을 하던 친구들을 잃었다.

 

좀더 거대하게 한방 세게 맞을 거라던 내 예상과는 빗나갔지만 에키 덕에 이야기가 완성될 정도의 린치는 당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누나와 동생에게 유산을 나눠준 뒤 집에서 피자를 기다리던 그를 찾아온 두 명의 괴한.

그들 덕에 알게 된 클라우스 베어의 정체..

 

어이없는 폭행을 당하고 입원한 병원에서 알만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레기나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를 치료해준 의사가 클라우스 베어인줄도 모른 채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는 그의 물음에담담히 대답한다.

 

'살던 대로 사는 거죠.'

 

그렇지만 이 말을 하기 전후에 그가 했던 생각은 앞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한 새로운 계획이었다.

 

이미 처음부터 책에서는 얘기하고 있었다. 복권 당첨되기 전과 후의 삶이 달랐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살던 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삶을 살 거라는 것을 말이다.

 

본문만 276쪽에 달하는 책 한권을 다 읽을 때까지 그는 '행복했었다', '앞으로는 행복하게 살아야지' 식의 얘기만 늘어놨었다면 앞으로는 '거만한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며 오래오래 사랑해 줄 거라던 다짐대로 자의에 의한 행복을 만들어가며 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돈이 주는 행복이 한순간에 의지하던 누군가를 잃으며 날아간 듯 보였지만 그는 극복할 것이다.

 

당첨금을 사기 당해서 몽창 잃었다는 뻔한 스토리를 기대했으나 작가가 복권 당첨 사실을 알리기도 전에 바람난 아내와 인색한 아버지를 아웃시켜 버린 것 처럼.

 

이렇게 보니, 오히려 이 남자. 복권뿐만 아니라 꼬일 뻔한 인생까지 잡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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