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나라들 - 번역된 세계를 여행하는 한 경계인의 표류기
판카즈 미시라 지음, 강수정 옮김 / 난장이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보다 훨씬 오래전에 비단길을 경유하여 중국과 파키스탄을 이어주는 카람코람 하이웨이를 통해서, 우리에게는 요거트 광고를 통해 장수마을로 알려진 살구나무 동네 '훈자'에서 머물기 위하여, 동네 근처 국경마을 서스트로 입국하여 비자를 받고 훈자에서 하룻밤을 보낸적이 있다.

  마을은 수목이 성장한계 지점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눈길을 주변으로 돌리면 산등성의 일정부분 밑으로는 푸르름이 우거지는 숲이, 그 위로는 마치 자로 잰듯 황량한 민둥산과 파아란과 순백이 곁쳐놓은듯한 하늘이 놓여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그곳 주민들은 코란의 가르침을 믿는 이슬람이다. 페사워르를 기점으로 카이버패스를 경유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갈수도 있고,헬레니즘 또는 간다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지역들을,  고대 알렉산더가 동양정복길에 남겨놓고간 마을로, 아니면 K2 베이스캠프로 가는 트레킹을 선택할 수도 있다.

9.11테러의 충격 이후 미국뿐 아니라 자의든 타의든 미국에 지지의사를 내비칠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국가들은 이슬람권을 이른바 전지구적 ‘악의 축’ 세력으로 규정하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이처럼 거대한 폭력은 이라크전쟁이라는 또 다른 폭력을 낳았다.

  2009년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철군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라는 점이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끊임없는 분쟁 등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들 지역에서 일상처럼 지속되고 있는 폭력은 우리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히틀러의 인종우월주의 인한 유대인의 대량학살로 야기되는, 유럽과 서구가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폭력에 외면하고 방기했던 또는 동조했던 미안함을 전혀 엉뚱한 방식으로, 특혜로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국제사회의 편협속에 그 땅에 오래동안 살아왔던 터전을 일방적으로 쫒겨나야 했던 서구의 결정이 오늘날 현재에도 앞으로 헤아릴 수 없을 오랜 시간의 미래에도 분쟁의 원인이 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앞날이, 현재 지금 이 시각에도 가자지구에서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거꾸로 가는 나라들>은 바로 그 폭력, 그리고 이들 나라 곳곳에 산재해 있는 빈곤과 불평등의 이유를 찾아나선 여정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 출신의 저자인 판카즈 미시라는 이 책을 통해 인도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및 그 주변 나라들이 탈식민지와 탈냉전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서구의 근대라는 개념을 어떻게 수용했으며 또 그로 인해 어떤 상처와 폭력을 껴안고 살아가게 됐는지를 여행기의 형식에 담아낸다.

  이 책은 먼저 식민지시기 영국이 남겨놓은 흔적들, 제도로서 도입된 서구식 민주주의, 그리고 힌두 민족주의자와 이슬람교도가 정치,종교적 문제로 갈등에 갈등을 반복하고 있는 알라하바드와 아요디아, 인도의 할리우드라 불리지만 정작 화려함이나 성공과는 거리가 먼 발리우드(뭄바이)를 차근차근 돌아본다. 이어지는 2부와 3부에서는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인 카슈미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네팔, 티베트 등지에서 이제는 거의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 내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폭력을 저자의 생생한 경험으로 전달해준다.

  서로 다른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각양각색의 신을 섬기는 나라들이지만 이들이 처해 있는 문제는 거의 비슷하거나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다. 서구식 근대화의 급물살을 타면서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에만 전전긍긍하는 소수 중산계층, 그리고 그보다 훨씬 두터운 층을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늘 빈곤에 허덕이는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 간의 문제가 그들 내부의 것이라면, 자신들이 가진 종교의 수난사를 배타적 종교 민족주의로 끌어올리면서 그것을 정치적 선동의 도구로 삼고 신과 종교라는 명목을 내세워 살인과 방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문제는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선다.

  인도와 영국을 오가며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저자는 이 나라들이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의 무게 속에서 어떻게 근대화를 이루어낼 것인가”라는 공통된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에 주목하고 그들이 “근대화와 멸망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그들만의 속사정으로 치부해버리기엔, 9.11테러에서도 보았듯, 서구세계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내비친다. 그러나 서문에서도 저자가 고백하듯이 이 책은 “정치인이나 훈수꾼 언론이 선호하는 광의의 일반화”와는 거리를 두고 있으며 “민주주의와 종교, 또는 테러 같은 문제를 추상적으로 거론”하지도 않는다.

  이 책에서 ‘신들의 나라’, ‘빛나는 인도’, ‘영혼의 성지’ 등으로 불리며 한껏 미화된 인도는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들과 읽는 이로 하여금 어이없는 웃음을 짓게 만드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우스꽝스런 행태만이 인도의 현실을 설명해준다.

  <거꾸로 가는 나라들>은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본 현대세계의 한복판에서 갈등과 딜레마를 담은 이야기인 셈이다. ‘앞으로만 가야 하는’ 근대세계의 문법구조에 비추어본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거꾸로 가는 것뿐 아니라 단지 정체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거꾸로 가는’ 것이 될 수 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 카슈미르 지방에서 저자가 직시한 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원한과 적개심으로 인해 진실은 은폐되고 사건의 전모는 모호한 채로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티베트에서 저자는 이들이 “거친 힘과 경제적 이해에 좌우되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지켜나가는지를 보여준다. 대량학살과 정치적 음모가 끊이지 않았던 티베트에서도 “즉각적이고도 극단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저자가 좀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들이 가진 자신들만의 독특한 불교문화와 비폭력정신에 있다. 비폭력이 “결코 나약한 자의 선택이 아니며, 부단한 노력과 절제를 요하는 어려운 길이라는 것”이라는 한 젊은 승려의 말은 지금까지 힐난의 어조로서 사용되었던 ‘거꾸로 가는’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다.

  <거꾸로 가는 나라들>은 점점 더 위세를 떨치고 있는 자본주의와 세계와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나라들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면서 외부의 시선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에 빛을 비춘다. 덕분에 우리는 거대한 폭력과 전쟁의 행간에 감춰진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