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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을 인문하다 - 문학과 철학으로 읽는 그들의 노래, 우리의 마음
박지원 지음 / 사이드웨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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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빨리 읽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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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9
하인리히 뵐 지음, 신동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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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텁게 분칠하고 기계적인 동작을 반복하는 희극배우를 보노라면 늘 거기엔 독특한 연민과 서글픔이 섞여있다고 느껴진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채플린의 익숙한 이미지들이고, 펠리니의 영화 <길>에 나왔던 젤소미나의 공허한 얼굴도 마찬가지다. 영화 <패왕별희>에서 가녀리고 유약한 경극배우로 열연했던 장국영의 죽음도 겹친다.


“내가 웃고 있나요, 모두 거짓인 걸요”라는 유명한 노래가사 한 줄은 이런 페이소스를 압축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광대는 이렇듯 오랫동안 많은 이들을 매혹해왔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우리 모두는 고통의 희극적 인물들이다. 부서진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광대, 얼굴의 웃음 근육을 자극하는 캐리커처다”라고도 말했다.


어릿광대는 우리에게 꽤 익숙하면서도, 사실은 그리 가깝진 않은 존재다. 배우는 몰라도 직업적인 광대를 자처하는 이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 오래전 그들은 개그맨 혹은 코미디언 등으로 불리는 직업군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우린 여전히 ‘광대’란 기호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정해진 시나리오나 대사가 없더라도 지극히 섬세한 표정과 움직임을 통해 관객의 넋을 빼놓는 누군가를 말이다.



“나는 너무 많은 순간을, 너무 많은 부분을, 자질구레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



광대는 고요하게 우스꽝스럽고, 신중하면서도 즉흥적이다. 그는 말하자면, 무대에서 자신의 몸뚱아리를 매순간 휘발시키는 존재다. 그는 눈앞에 벽이 없다손 치더라도, 관객들 모두가 눈앞에 벽이 있다고 굳게 믿게끔 만든다. 아니, 어쩌면 거기엔 정말로 모두가 볼 수 없었던, 보기 싫어했던, 오직 광대만이 볼 수 있던 벽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독일작가 하인리히 뵐의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를 읽은 후,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홀딱 반해버렸다. 우리는 컨테이너 벨트와 낑낑대며 싸우거나, 왕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풍자와 재담을 이어갔던 광대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들은 바 있다. 다시 말하지만, 광대란 직업은 자신의 몸 하나로 남에게 ‘진실’을 강요하려 드는 훌륭한 기호다.


여기서 정말로 무대 위에 벽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광대는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진실을 묘사할 뿐이다. 아무것도 보이진 않지만, 누구도 “없다”고는 확신할 수 없는 벽 하나를 고독하게 만들어내는 예술가가 바로 광대다. 물론 그 벽에는 윤리나 인간성, 혹은 반성과 성찰이란 이름도 붙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종교적 전언이 작품의 서두를 장식하고 소설 안에서 거듭 반복되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분의 소문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그분을 보여주고, 그분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그분을 깨닫게 해주리라.”


하인리히 뵐은 자신이 창조한 스물여덟 살의 어릿광대 한스 슈니어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성인(聖人)의 품격을 부여한다. 그러나 슈니어의 처지는 절망스러울 정도로 초라하고 비참하다. 그는 6년 동안 동거했던 애인을 잃은 후, 더 이상 어떤 무대에도 오를 수 없게 되어버린 인물이다.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광대는 더 이상 광대가 아니다.


여기서 작가 하인리히 뵐은 한스 슈니어의 ‘무대’와 ‘관객’을 슬쩍 바꿔치기함으로써 그를 존엄하게 재탄생시킨다. 그의 무대는 이제 이름 없는 싸구려 극장이 아니다. 그는 인류사에 유례없는 학살과 전쟁 이후 새로이 부흥하던 1950년대의 독일이란 무대 위에 서 있다. 한스 슈니어는 우리가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그저 날것 그대로의 팬토마임과 독백을 이어간다. 그러나 바울이 그러했듯 그 또한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며 깨닫게 하려 애쓴다.



“나는 어릿광대야. 그리고 순간들을 모으고 있지”



한스 슈니어의 무대에 함께 선 배우들은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는 문제적 인물들이다. 그리고 슈니어는“우리 시대가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다면, 매춘의 시대로 불려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 재계를 주름잡은 거부(巨富)다. 그의 어머니는 슈니어의 누나를 아무 거리낌도 없이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와 관계를 맺었던 친구들은 과거의 행적이 어떻든 명사(名師)의 이름을 내걸고 각기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그의 정신을 지탱해주었던 애인 마리는 종교의 품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어릿광대는 교회에 세금을 낼 의무가 없다. 한스 슈니어는 오래전 나치의 ‘똘마니’를 자처했던 옛 친구의 뺨을 후려친 적이 있다. 그런 행동이 ‘비기독교적’이라고 울면서 비난하던 마리에게 그는 말한다. 자신을 위한 고해소는 여전히 열려 있지 않다고. 슈니어를 위한 고해소는 교회뿐만 아니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몰락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의의는 당대 독일의 병폐를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나는 그런 단순한 결론은 결코 작가가 원했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작품의 최종적 독해는 소설을 읽는 저마다의 몫이겠지만, 그렇듯 ‘독일’이란 정형화 된 카테고리에 얽매이면 오히려 슈니어의 울퉁불퉁한 내면에 천착하는 소설이 자칫 갸우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어릿광대 한스 슈니어는 이렇게 말한다.


“큰일을 후회하기는 매우 쉽다. 정치적 오류, 간음, 살인, 반유대주의― 그러나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가? 누가 그 자세한 내막을 이해하는가?”


그가 말하고자 했던 진실은 유죄와 무죄, 나치와 반(反)나치 식의 헐거운 범주는 아니었을 것이다. 슈니어는 추상적인 원칙과 언어의 힘을 결단코 믿지 않았다. 인간은 생각만큼 그다지 강한 존재는 아니다. 믿을 만한 존재도 아니다. 누군가가 참회와 반성을 입에 올린다고 그가 진정 거듭났다고 믿는 일이 가능하긴 한 것일까. 속임수와 거짓말이 난무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은 반세기 전 독일이든 작금의 우리 사회든 별반 다르지 않다.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 어릿광대가 보여주려 애쓰던 무대 위의 ‘보이지 않는 벽’은 무엇이라 해야 옳나. 모든 순간은 되풀이될 수 없으며, 그의 연기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저 그의 기진맥진한 독백에 귀 기울일 수 있을 뿐이다. 그때 우리 주위에 숨어있던 ‘진실의 순간’들이 비로소 어떤 투명한 얼굴을 드러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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