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털리 부인의 연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5
D.H. 로렌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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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소설 읽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 이름과 관계가 잘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짓을 해야 소설이 눈에 들어 온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지… 쯧!! 이렇게 하지 않으면 소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두뇌구조는 뭔지 자괴감에 빠지게 됐었다. 그래서 소설은 내게 낯선 장르였나 보다.

영화나 드라마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관계 구도 속에서 벌어지는 이벤트들이라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소설과 다른 점은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수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닥 좋아하지 못했다. 이 말은 싫다는 말은 아니고 힘들어 했다는 뜻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감동도 많이 받아 봤다는 점을 밝힌다^^;;;


엠마누엘 부인, 아~~ 아니 채털리 부인이면 빨리 그 이벤트가 벌어져야 하는데 이상한 이야기만 한참 하면서 몇장이 지나가고, 정작 사실상 주인공 격인 멜러즈는 100p에 와서야 겨우(?) 등장한다. 그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멜러즈와 썸씽이 생긴다. 뭐 이리 재미없어, 뜸도 한참 들이네… 등등 이런저런 실망 아닌 실망을 하면서 이 책을 읽어 나갔다.


심지어 그 이벤트도 내가 생각했던 이벤트의 묘사는 아니었다. 야설로 불리는 글을 한편만 읽어보면 그 차이는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미 (2012년) 고인이 된 실비아 크리스텔 누님의 영화(1974년)는 보지도 못했지만 - 어렸을 적엔 내가 볼 수 있는 영화 등급이 아니었기에 (진심) (지금까지도) 못봤음!!! -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에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라는 책은 그런 기대로 가득했었고, 그 안개를 걷어내는데 40년 이상이 흐른 것 같다. 성애묘사로서의 문학과 음란으로만 충만한 저급한 문장의 나열과는 너무 명확하게 다르다는 것을 일반 대중에게 알게 해준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발견한 맥락은 멘붕이다.

특히 멜러즈의 경우, 이런저런 이유로 세상과 단절하고 숲속으로 들어와 혼자 살고 있는데 한 여인과 연결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멘붕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멜러즈로 이입하며 읽었었는데 정말 괴로웠을 것 같았다. 와이프에게 학을 띠며 속세와 단절하며 살고 있고 다시는 세상과 커넥션 없이 살리라 하고 지냈는데 어느새 실비아가…. 아니 코니가 자기 마음 속에 와 있고 그녀와 이미 섹스를 하고 있는 모습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바라던 그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코니는 채털리가 아니던가… 자신의 주인 채털리의 아내인 채털리…

나는 세상에 환멸을 느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으며, 이 세상은 믿을 만한 곳이 못돼… 나를 이런 곳에 나를 둘 수 없어, 난 깨끗하게 이곳 숲 속에서 단절과 홀로서기로 독야청청하며 여생을 살꺼야. 자연은 나를 버리지 않고, 나도 자연이 좋아… 이게 내 인생이야, 난 자연인이다~~~ 이러면서 윤택이나 이승윤을 기다렸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 멜러즈로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코니가 내 숲으로 왔고, 내 집 안으로, 내 마음 속으로 깊숙히 들어와 버렸다.

멘!!
붕!!


클리퍼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보려고 했는데 역시 비슷하다고 느꼈다. 마이클리스라면 혹시 모를까 내 아내가 멜러즈랑??? 하찮은 개 돼지와 비슷한 부류인 저 상것 사냥터지기랑??? 여자들이 (ex) boyfriend가 만나는 여친이 나보다 확실하게 못하다고 판단될 때 느끼는 그런 감정과 비스무리한 느낌이 아닐까 싶다. 결과적으로 멘붕의 감정을 느꼈으리라...

나는 화성이 고향이어서 금성이 고향인 여자를 알 수 없지만... 코니도 멘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싶었다. 코니 자신은 지식인 부모를 둔 전형적인 프로레타리아 계급의 여성이다. 비록 귀족(부르주아) 계층은 아니었지만 귀족들이 갖지 못한 지적 풍요를 가진, 귀족만은 못해도 남부럽지 않은 부와 여유를 가진 사람으로서 남편 유고시 자신이 선택한 차선이 멜러즈라는 것은 … 쫌 …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시선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코니 자신에게도 충격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렇듯 이 책은 멘붕이 1~2권을 흐르고 있고 1장부터 19장까지 흐르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내가 본 관점이 무엇이냐 하면... 과연 멘붕을 이끈 요인이 무엇인가? 그게 성(sex)이 아닌가? 로렌스가 이런 관점에서 성을 중요한 테마로 음란(?)하게 글을 써 갔다고 생각했다.
미천하나마 성에 대해 책을 읽어가고 독학해 가는 입장에서 이 책은 내가 읽어야 할 리스트 안에 있었던 책이었고 그래서 2번째 읽은 유일한 소설이었다. 이 책은 성에 대한 20세기적 입장과 지식 정도의 책이며, 로렌스의 코니를 통해 읽은 여성의 심리와 성에 대한 입장과 태도 역시 20세기적이다, 성의 환희에 대한 묘사도 결국 20세기적이라고 보였다. 딱, 그만큼이었다. 20세기 성장주도적인 산업세계에서 정약용 같은 학자가 존경받지만 21세기에서는 다산 콜센터로 그 역할을 다 한 것처럼, 성에 대한 이해와 묘사는 거기까지 였었다. 나쁘다는 뜻, 부족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다만 "지금은" 다른 패러다임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성(sex)이라는 것은 사실상 인간 행동의 근본적 이유와 내밀한 원인이 된다.

이 말에 수많은 반박이 따른다는 것을 안다. 특히 여성들에게서…
그러나 여성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여성도 남성도 똑같은 human이고 animal이라는 것을.

이 말을 납득시키려면 사실상 불가능할 거라는 것을 알기에 길게 쓰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짧게 풀면 이렇다.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종교적 철학적 환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사상사의 처음부터 사람에게만 영이 있다는 논리가 득세한다. 그리하여 영과 육 or 영,혼,육 이렇게 2분법, 3분법으로 구분해서 이해하게 된 논리 가운데서 영적인 부분을 강조(스토아학파)하면서 생긴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치 영을 추구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이해하고 그런 인간이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2~3천년 동안 가르쳐 왔다. 무려 2~3천년 동안이나….

그러나 요즘 과학과 모든 인문학 등에서는 사람의 동물됨 즉 '육(에피큐로스학파)'을 더 강조한다. 이 말에 상당히 길고 긴 논리와 실험결과의 데이터들과 뇌과학과 실례들을 첨부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1500페이지 이상의 책이 되기에 할 수 없다. 다만 사람을 이해하는 패러다임이 완전 달라졌다는 것이고 그런 관점에서 육이 강조되고 즐기는 YOLO족이 "다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욜로 패러다임은 가치보다 지금의 쾌락(이 말은 굉장히 좋은 말이다. 저급한 오해는 금물)이 내일의 행복보다 가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 참고 인내하기 보다는 행동하며 행동에서 오는 기쁨을 즐기는 쪽으로 전환되었다는 말이다. 참고로 여기서 육을 성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다. 육에서 얻는 기쁨 중 가장 큰 것이 성이기 때문이다. - 다만 성이 전부는 아니다. 다른 것도 있지만 성이 없는 육은 없는 것이다. 그런 존재를 천사(육은 없고 영만 있는 존재)라고 한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연결하자면, 코니와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2~3천년 동안 교육받아온 그 패러다임 속에서 살다가 성(sex)을 통해 욜로 아니 carpe diem적 삶을 경험하니 이게 참 인생이구나, 그럼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고, 살아온 인생은 모지?? 하는 혼돈 속에 빠지게 된 것이라고 보았다. 약간의 입장의 차이는 있겠지만 멜러즈도 클리퍼드도 심지어 코니도 성을 통해 (준비되지 못한) paradigm shift를 경험했다. 그 경험은 기존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거부되는 것이지만 절대로 과거로 되돌아가지 못할 something이었기에 결국 작별하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결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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