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허밍버드 클래식 M 2
메리 셸리 지음, 김하나 옮김 / 허밍버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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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하루준 평점 : ★★★★☆ (9/10)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많은 사람들이 정확한 내용은 모르더라도 괴이한 형체를 하고 있는 공포스러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미지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재미있는 소설로 공상과학소설의 아주아주 오랜 조상님격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책을 받아 보았을 때 느낀 점은 공상과학, 그것도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기이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한 생명체가 출연하는 작품치고는 책의 표지가 너무 블링블링하고 이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마치 표지만 보면 연애소설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책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되돌아보고 생각하게 만든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지는 느낌이랄까? 과연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악'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도서정보

제목 : 프랑켄슈타인

저자 : 메리 셸리 / 역자 : 김하나

장르 : 고전소설

페이지 : 400

출판사 : 허밍버드

출판일 : 2019. 12. 2.

책을 읽고 느낀 점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과 그에 반영된 정형화된 (머리에 볼트를 꽂고 있는)이미지만을 갖고 있던 내게, 창조자와 피조물간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인간의 복잡한 감정 변화를 다채롭게 표현한 내용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와는 다른 존재에 대한 혐오(그 존재를 스스로가 만들었음에도)와 내가 아닌 모든 존재로부터 배척을 당하면서도 그들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희망하는 괴물의 모습에서 오히려 공포와 절망보다는 슬픔을 더 많이 느꼈다.

프랑켄슈타인을 읽으면서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는 아니지만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로 바꿔 대입하더라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과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음에 안타까움과 슬픔이 느껴졌다.

출산과 함께 남들과 다른 기형을 안고 태어나는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 중 소수의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기도 한다. 이 책에 나온 그 괴물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꿈꿨던 것처럼 그러한 아이들 역시 조금씩 커가면서 감정을 느끼고, 언어를 배우면서 사람들과 함께 하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는 삶을 간절히 원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배척을 당하면서 느끼게 될 그 아이들의 고통과 절망이 결코 소설에 나오는 괴물보다 작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만일 빅터가 자신의 피조물인 그 괴물을 버리지 않았다면, 곁에서 지켜주고 돌봐주고 사랑을 나눠주었다면, 과연 그 괴물이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일삼는 진짜 괴물로 변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나와 또는 우리와 조금 다름을 이유로 누군가를 혐오하게 된다면 우리도 결국엔 괴물을 창조해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

프랑켄슈타인 : 줄거리



이 책에서 빅터와 우리가 흔히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알고 있는 괴물은 창조조와 피조물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빅터는 자신이 그토록 염원하며 생명을 불어넣었던 인간의 형상을 한 피조물이 눈을 뜨는 순간, 그를 버리고 도망치고만다.

혼자 남겨진 괴물은 인간 마을에서 사람들의 공격을 받고 산속을 배회하며 조금씩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인간의 언어를 배우게 되면서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삶을 꿈꾸지만 결국 이런 그의 바람은 기형적인 신체와 혐오스러운 외모로 인해 다시금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기대를 않고 찾아간 창조자 빅터 역시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 소설의 이야기는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빅터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 둘 살해하며 창조자가 겪는 불행을 자신의 불행에 대한 보상으로 여기는 괴물과 모든 것을 잃고 복수심에 가득차 괴물을 없애기 위해 삶을 내던진 빅터의 모습은 과연 어떤게 선이고, 어떤게 악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만큼 나에게 많은 혼란을 주었다.

끝없이 더해지는 불행의 연속, 그 가운데에 있는 창조자와 피조물인 두 존재를 통해 나완 다른 존재에 대한 인간의 혐오와, 사랑이라는 감정을 간절히 원했던 괴물의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에 와닿았던 문장들



P. 68

"아,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로구나! 사랑하는 내 아들 빅터, 이런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려무나. 이런 건 그저 한심한 쓰레기에 불과해."

만약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대신, 어린 아들에게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하는 고역을 감내하고서라도 아그리파의 주장을 낱낱이 파헤쳐 주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르오. 고대의 과학이 허무맹랑한 상상을 기반으로 하는 가설임에 비해 현대 과학은 실재하는 것을 실용적으로 다루는 학문이므로 현대 과학의 체계가 훨씬 뛰어나다는 설명을 들었다면, 아마도 나는 아그리파의 이론을 기억의 한구석으로 밀어 버리고 예전처럼 내가 상상하던 것에 만족하며 다시 기존에 다루던 주제로 돌아가 공부를 계속했을 테니까. 그리고 그랬다면 더 나아가 나는 나를 파멸로 이끈 그 끔찍한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았을 수도 있소.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그 책을 쳐다보던 시선에서 관심이라곤 조금도 읽어 낼수 없었기에, 아버지가 그 책의 내용을 잘 안다는 확신도 전혀 할 수 없었소. 그렇게 나는 계속 아그리파의 책을 읽는데 열중하게 되었소.

- 관심,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버릴 수 있는 작지만 강력한 힘이 바로 애정어린 관심이 아닌가 생각한다. 빅터의 아버지가 조금 더 깊은 관심과 애정어린 시선으로 설명해주었다면 어쩌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수도 있지 않을까?

P. 74

악은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며, 행복은 가만히 기다려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소.

- 악(불행)은 적극적으로 다가온다에 공감. 하지만 행복 역시 가만히 기다린다고 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행복을 누리려면 행복해지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행복은 누군가가 선물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P. 77

시간이 흐르면 상실의 본질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제야 비로소 쓰디쓴 진짜 슬픔이 시작되는 법이지.

- 연애 하다 헤어진 경험이 대부분 있을거다. 헤어진 뒤 바로는 그 슬픔이 크지 않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커지는 슬픔을.

P. 129

빅터, 집으로 돌아오되, 범인을 향한 복수심을 품고 돌아오지는 말아라. 온유하고 따뜻한 마음만이 우리 마음의 상처를 덧나게 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치유할 수 있단다. 가족을 잃고 슬픔에 잠긴 이 집에 들어설 땐, 원수를 향한 미움은 버리고, 널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배려만 품어야 한다.

- 과연 내가 빅터의 아버지라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내 아이가 죽임을 당했음에도 범인에게 복수심을 품지 말라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불의한 일을 당했다고 해도 불의로 갚지 말고, 변함없이 정의를 행하는 것이야말로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생각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P. 174

수많은 감정은 더 많은 것을 감당하게만 하잖소. 만약 우리에게 배고픔, 갈증, 성욕과 같은 원초적인 욕구밖에 없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워질 거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기에, 이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나부끼고, 누군가가 건넨 우연한 말한마디나 우연히 맞닥뜨린 풍경에도 울컥하게 되지.

- 우리는 원초적 욕구 외에도 너무 많은 감정을 갖고 있다. 그게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이기도 하겠지만 이러한 다양한 감정이 어떻게 보면 사람을 한 없이 약해지게 만들기도 한다. 가끔은 감정에 무뎌질 필요도 있는 것 같다. 이왕이면 그걸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보고, 깨달은 것 적용하기



:: 본 것 : 점점 더 비극으로 치닫는 두 존재의 관계

:: 깨달은 것 : 나와 다름을 이유로 누군가를 혐오하는 행동은 하지 말자

:: 적용할 것 :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나와 다름에 애정을 갖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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