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커뮤니티 탐방기 - 면허증 없는 그녀와 신용카드 없는 그의
김정현.배수용 지음 / 착한책가게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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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과 능력주의가 일상이 된 삶 속에서 여전히 남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착한 사람은 바보가 되는 세상이라며 저마다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세상에서 여전히 그 진부하고, 답답하고, 촌스러운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불행히도 십대 시절부터 이런 사람들을 봐 왔다. 동네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지역의 소수 정당 모임에서, 그리고 해외 봉사를 떠난 나라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났다. 물론 그곳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의 일부, 그러니까 아주 극소수만이 빛과 소금처럼 저마다의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었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경지의 일이어서 늘 그 주변을 쭈뼛거리며 맴돌다가, 언제나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나는 그보다 재미있고, 짜릿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것들에 빠져서 인생을 실컷 낭비하다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인생이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낭비한 젊음 뒤에는 온갖 종류의 청구서들이 뒤따라왔고, 사라지고 싶다고 마음대로 사라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남을 돕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과 마주할 때마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과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이 반짝 빛을 내다가 사라졌다. 

 

《면허증 없는 그녀와 신용카드 없는 그의 유럽 커뮤니티 탐방기》는 바로 그 진부하고, 답답하고, 촌스러운 가치를 담은 책이다. 못돼먹은 나로서는 읽을 때마다 안 하던 운동을 할 때처럼 두세 배로 힘이 들지만, 그만큼 안 쓰던 마음의 근육을 쓰고 군살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 책에는 지역 공동체와 문화 기획에 관심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이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등 5개국의 14개 도시에 있는 지역 도서관과 서점, 시민 센터와 커뮤니티를 탐방한 내용이 담겨 있다. 지역 공동체를 품은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개설된 마을 도서관과 지역과 상생하는 아이디어들로 반짝이는 커뮤니티 서점에 관한 이야기는 국내에도 적용해 볼 만 아이디어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관심이 갔던 것은 놀이 커뮤니티, 문화예술 커뮤니티, 사회교육 커뮤니티, 시민 센터, 히피 문화생태 공동체, 시니어 공동체, 사회주택 공동체, 서점 상인 커뮤니티 등 새롭고 다양한 지역 커뮤니티와 단체들이었다. 가끔 진보 매체에 특집 기사로 실리곤 하는 이러한 실험적인 공동체들의 모습이 실제로 어떠한지 관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조금이나마 실제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사회적 약자와 관계 맺기를 하는 자원 활동가 커뮤니티]

“아직은 난민이나 노숙인 같은 사회적 약자 계층이 정보를 요청하는 경우도 적을뿐더러 이들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잠재적 통제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이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포용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냈다는 점이다. 그 방법은 바로 ‘관계’다. 자원봉사자를 많이 배치하여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도서관의 공공성은 또 한 번 실현된다.”(pp.73-74) 



[지역 상인과 상생하여 전문서점의 폭을 넓힌 리베 아이메스 서점]

“꽃집과 서점이 무슨 관계가 있나요?” “스페인의 기념일 중 산 조르디의 날(4월 23일)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 날은 세상이 장미와 책으로 가득 차는 날이에요. 남자는 여자에게 장미를 선물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지혜가 담긴 책을 선물하는 거죠.” 알고 보니 ‘산 조르디의 날’은 스페인에서 매우 큰 축제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책 축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서점과 꽃집이 상생하는 효과를 누리고 있었다. (p.117)



[히피가 추구하는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모아보자]

“미친 사람들을 모아보자! 이게 저희의 시작이었습니다. 모여 보니 히피들이었죠.”(p.247) 



[모두가 늙어가는 중, 자기결정권으로 시니어의 책 문화를 만들어간다]

“저는 유머를 잃지 않으려고 해요. 어떤 서점은 매우 진지한 문학책이 많고, 또 어떤 서점은 음악책만 있어요. 그곳에선 늘 음악이 흘러나오죠.” 아니나 다를까, 유머라는 분류판이 서점 공간의 맨 중앙에 놓여 있었다. “저는 위트와 유머를 중요하게 여겨요. 여러분도 인생에서 유머를 잃으면 안 돼요.” “가장 아끼고 추천하는 책들이겠네요?” “그럼요. 웃으려고 사는 거 아니겠어요?”(p.266) 



[자신의 노동과 공동체 활동이 분리되지 않게 하는 것이 지속성의 열쇠] 

“현재 우리나라 공동체 사업은 지자체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참 많다. 지자체의 지원금을 바탕으로 공동체가 조성되고 영위되는 사례가 많다. 그렇다 보니 지원금이 줄거나 끊길 경우엔 붕괴되거나 침체되는 경우 역시 적지 않다. 문제는 자립이다. 자신의 노동과 공동체 활동이 분리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p.258)



[인간의 존엄은 공동체로 실현된다]

“공동체의 다양한 모습을 직접 살펴보고, 사회에 대한 방대한 이야기를 현지인의 입을 통해 들으면서 내린 하나의 결론은 인간의 존엄은 평등을 강조하는 공동체로 실현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만나본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나의 존엄은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상대방의 존엄을 존중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커뮤니티를 단지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로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구조 차원에서 논의되고 바라보며 모두가 커뮤니티를 만들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중략) 일반 사람들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저소득층과 섞이며, 젊은이와 나이 든 사람, 그리고 어린이가 어울려 있습니다. 거기엔 오랜 회사생활을 마친 은퇴자도 있고요. 고학력자와 노동자와 이민자가 소외되지 않고 의사결정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를 위한 공유공간을 만들고 함께 누리며 삽니다. (중략) 우리는 탐방한 기관들의 이러한 인식과 실천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본인식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중략) 이 책에서는 유럽의 공동체가 주는 시사점과 함의가 우리나라에서도 모두 적용 가능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일부러 우리 사회의 관행이나 노동시장, 근로여건, 시민사회 상황 등은 매우 제한적으로 언급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부분에선 간극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이 이 책의 한계점이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유럽의 사회정책은 산업화 이전부터 꾸준히 존엄의 문제에 대해 토론해 온 결과 이루어진 것입니다. 삶의 질에 대한 토론이 전제되어 정책들이 이루어졌기에 시민들의 생활여건은 양호한 수준입니다. 노년층은 말할 것도 없지요. 우리나라에서 공동체가 형성된 과정과 실현된 모습과는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소 느릴 순 있어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는 정부의 몫인 법과 제도라든가 예산과 행정 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패러다임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거창한 포부를 갖도록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모두가 각개전투하듯 살아가는 현실에서 다른 대응 방식도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존엄을 위해 남을 짓누르고 권위를 내세워 힘을 빼앗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라고 싶었습니다.”(pp.322-326)



[생각해 보면 나를 성장시킨 건 함께한 시간들이었다] 

“제 삶에는 나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것이 함께 존재합니다. 때론 상대방의 것이 저의 일상에 더 많이 있기도 합니다. 출근하는 길 동료를 위해 하나 더 사게 되는 아침거리가 그렇고, 친구들과 함께 활동하는 동아리가 그러합니다. 개인의 삶은 사실 많은 부분 느슨해서 타인의 감정이나 의견이 그 틈으로 쉽게 반영되곤 합니다. 그것이 관계가 되고, 내가 일으켰든 아니든 갈등이 되기도 합니다. (중략) 해결에 있어 중요한 점은 책임을 개인화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에게 넌 나쁜 사람이야, 네가 진짜 문제야, 네가 이 모든 불란의 씨앗이야, 라고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누구보다 더 상처를 많이 받았는지 계산하며 승자와 패자를 만드는 상처 게임으로만 그치게 됩니다. 게임이 되지 않고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려면 공동체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pp.335-336)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고민만큼이나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느리지만 지속 가능한 무언가를 만들어 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 볼만 한 책이다. 선함과 온유함, 성실과 인내, 친절과 배려, 따뜻한 위로와 격려, 웃음과 미소가 언제부터 진부하고 촌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을까, 이러한 성품과 가치를 좇는 사람들이 왜 위선과 가식이라 조롱을 받게 되었을까... 누가 뭐라고 하든 기꺼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려는 바보 같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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