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는 배후가 없다 세계사 시인선 23
임영조 지음 / 세계사 / 199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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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를 찾아서

‘개같이 아부할 줄 모르고/돼지같이 과욕할 줄 모르고/고양이같이 교활할 줄 모르는/그래서 늘 외롭고 검소한 축생’이며 ‘완강히 저항하는 외고집’(「염소를 찾아서1」)을 가진 염소는 현재 부재중이다. 시집에서는 시적화자가 납부금을 내려고 새끼 밴 염소를 몰래 내다팔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더 이상 염소가 풍월을 읊으며 고독을 즐기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소는 기본적인 자신의 백면서생의 성품을 살아갈 수 없기에 ‘그만 탈출하고 싶다/검은 절망의 외투를 벗고/구닥다리 수염도 깎고/이 외진 마을을 떠나고 싶다’. 이제 시인은 안다. 자기가 납부금을 내기 위해 팔아버린 그 염소는 자기가 정작 찾고 싶은 자아였다는 것을.

이 시집을 읽기 전 ꡔ귀로 웃는 집ꡕ을 먼저 읽어서 인지 ꡔ귀로 웃는 집ꡕ에서 나오지 않던 현실 공간이 ꡔ갈대는 배후가 없다ꡕ에서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ꡔ갈대는 배후가 없다ꡕ에서 시인은 ꡔ귀로 웃는 집ꡕ에서와 같이 초월적 자아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백면서생의 성품을 지니며 살아갈 수 있는 현실과 자아를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시인의 지향점이 시인이 ꡔ갈대는 배후가 없다ꡕ에서 현실 공간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대만원인 서울의 파편처럼 생겨나는 경기도의 도시들(「果川別曲」), 그 도시들은 끊임없이 서울이라는 중심을 그리워하며 밤마다 서울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자고 있고,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옭아매며 노예처럼 바쁘게 끌려 다닌다(「넥타이」). 시 「회전문」에서는 빡빡하게 살아가는 도시인의 일상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시인의 눈에 회전문을 들어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하루를 거대한 공룡의 아가리에 전신을 구겨 넣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가시만 남은 채 분해 되고 밤이 되면 납작한 오징어가 되어 거리로 토해진다.

이런 공간에서 시인은 ‘노란 티켓 한 장 사들고/하행선 열차를 기다리는 사십대’(「안전선 밖에 서서」)의 자신의 삶이 서럽고 부끄럽다. 자신이 원하는 자아의 모습과 현재 자신의 모습의 거리가 한없이 멀어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ꡔ갈대는 배후가 없다ꡕ에서는 자기를 지우고 싶어 하는 시인의 모습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눈 오는 날에」에서는 ‘이미 잘못 산 생애와/스스로 절망한 자는/과거를 표백하듯 망각’ 하고 싶어하고 「권태를 위하여」에서는 ‘꾸벅구벅 졸다 가다가/그만 깜박 잊고 내리듯/나를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누」에서는 ‘살면 살수록 때가 타는 세상에’ ‘속죄하는 기분으로 몸을 씻’는 행위를 한다.

하지만 자신에 삶에 대한 부끄러움은 자신을 지우고 싶은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과 같은 삶을 사는 것들을 발견하고 그 대상들에게 끝없이 연민하기도 한다. 불구된 아이들이 황홀한 부채춤을 추는 모습은 시인을‘ 눈시울이 뜨거워지’게 하고 ‘내 멀쩡한 四肢’를 부끄러워하게 한다(「채송화」). 그리고 ‘돈만 주면 언제든/ 제 몸속 피까지 파는 사내’를 욕하기보다 시인이 사는 시대에 그 사내와 자신이 다를 바 없음을 알고 연민을 한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부정은 하지만 그의 ‘염소’를 찾고 싶은 열망에 의해 늘 보류된다. 그래서 시인은 늘 ‘한가닥 희망과 만나기 위해/오늘도 낯선 길을 헤’(「미로찾기」)매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온갖 애증을 지우고’ ‘이 춥고 긴 여백 위에/ 이만 총총 마침표’(「12월」)를 찍자고 한다. 이 마침표는 끝으로 가는 망막함이나 슬픔이기보다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온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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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씨의 1일 세계사 시인선 10
함민복 지음 / 세계사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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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단절로 이어가는 과거와 현재
-ꡔ우울氏의 一日ꡕ과 ꡔ자본주의의 약속ꡕ

소외된 자

유하가 소비자본주의의 한 복판에서 스스로 그 배에 함몰해 가는 소비 대중의 모습이었다면 함민복은 그와 다르다. 그의 가난이 이유이기도 하지만 함민복은 소비자본주의를 향유하지 못하는 자본 소외 계습에 속한다. 유하가 자신의 삶이 되어버린 소비자본주의를 의식적으로 비판하려했던 것에 반해 함민복의 소비자본주의 비판은 체험적이다. 둘 다 시에서 풍자와 위트를 보여주지만 유하가 사용한 풍자와 위트가 제 깊이를 획득하지 못한데 비해 함민복의 풍자와 위트는 읽는 이에게 소비 자본에서 소외된 사람의 쓸쓸한 풍경을 가슴에 새겨놓는다.

시「라면 먹는 아침」에서 살펴보자. 시「라면 먹는 아침」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이 거지보다 덜 가난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아침 식사는 단무지와 라면이다. 그리고 그는 라면의 국물의 양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소금을 풀어 넣는 생활을 한다. 그의 일상이다. 하지만 그는 라면 아래 까는 신문지에서 철거민 소식(즉 소외 계층)과 과하게 먹는 현대인들에게 변비약을 권하는 광고를 동시에 본다. 굴비는 매달아 쳐다만 보고 밥만 먹던 영감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과하게 먹는 현대인들을 굴비처럼 쳐다봐도 배가 부르다고, 그래서 매일 아침이면 상다리가 부러진다고 말하고 있다. 시적 화자의 아침 풍경은 너무도 쓸쓸하지만 그 쓸쓸함을 넘어서려는 그의 위트는 그 스스로에게는 건강한 위트이며, 동시에 소외된 사람들의 삶의 팍팍함을 더욱 배가시켜 드러낸다.

이러한 그의 체험은 사실 생득적인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가난에서 멀어질 수 없었던 그의 어린 시절이 시 속에서 등장한다. 시 「박수소리1」이 대표적으로 그러한 예일 것이다. 그 날의 운동장 조회는 그에게 '라면박스를 주셔 고맙습니다'로 기억되는 시절이 아니라 가난의 징표가 공공연하게 자신의 가슴에 새겨져버린 날이다.

유년의 공간과 단절

하지만 그런 가난한 시절에서 시적 화자는 가난만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시「달, 향수의 포석-약초 캐며 살던 시절을 추억함」에서 시적 화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약초를 캐러 다닌다. 어린 화자였기 때문에 약초 캐는 일이 노동처럼 느껴지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약초 캐는 일은 ‘어둠이 山 담는 것도 모르고/ 신바람나던’, 자신을 끌어주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둠에서 환한 빛을 만들어주는 달처럼 느껴졌던 시절이다.

비록 어머니, 아버지는 밤새도록 캐야하는 그 노동이 힘이 들었겠지만 그러한 노동은 소비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에 비해 건강하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노동은 서로에게 분리되지 않고, 자연과도 분리되지 않아서 따라다니는 시적 화자에게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심어준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끊임없이 일을 하지만 자식과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자식들은 그들 부모의 노동이 고되다는 사실도 모르고, 부모의 고된 노동이 자신을 유지해주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소비 자본 사회로 진입은 그의 유년시절의 죽음으로 나타난다. 「경로당」에서 노인들은 명아주대 지팡이로 말줄임표를 찍으며 다른 노인의 꽃상여를 따라간다. 한 시대, 즉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농촌을 지켜왔던 사람들이 죽어간다. 시「한겨울의 노래」에서는 시적 화자의 아버지가 죽는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소비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죽으면서 남긴 것은 무엇인가. 함민복은 그것을 「한겨울의 노래」에서 이렇게 말한다. ‘술 한사발에 상여소리 더 구성진 상여꾼의 발자국도/뒤돌아보면 눈 덮여 우리는 어디서 떨어졌는지/또, 눈송이처럼 어디로 쓸려가야 하는지’라고. 소비 자본주의로 진입하는 시대에 아버지의 죽음은 소비 자본주의가 장악해버리는 시대이다. 자신의 생의 근본이었던 황토 속에서 발 디디며 일하던 날들은 사라져버렸다. 그의 뿌리가 끊겨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어디론가 떠나가는구나/뿌리가 더 괴로웠으리라/나는 씨 없는 수박’(「수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지난 시기와의 단절을 함민복은 소비 자본주의 사회 안의 문화에서도 찾아낸다. 시집 ꡔ우울氏의 一日ꡕ에서 시적 화자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4년 일하고 퇴직한 사람이다. 그의 퇴직은 정신병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지금 15% 할인된다는 한국전력 부속병원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 곳에 가서야 친구들을 만난다. 그는 현재 죽음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죽음 콤플렉스는 산업 자본이 생성한 것이기도 하다. 산업 자본은 노동자가 일하는 환경의 위험성을 늘 감추려한다. 하지만 그에 반해 대중매체는 공공연하게 그들이 일하는 환경의 위험성을 노출한다. 자신이 일하는 공간의 일을 그 공간이 아닌 타 공간에서 알게 되는 괴리감. 자신이 일하는 공간과도 단절되어 있는 화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단절되어 있다. 지하철에 빼곡이 들어선 사람들은 서로 강제적 카섹스를 당한다고 생각하며(우울氏의 一日․1」), 시적 화자는 현실의 사람이 아닌 광고에 등장하는 여인과 (상상으로)사랑에 빠진다(「자본주의의 사랑」). 자연 역시 인간과 분리되어 현란한 간판과 시멘트를 잠시 있게 하는 최면의 역할만을 할 뿐이다(「여행에 대한 비관론」).

유하와 함민복의 유년의 공간

여기서 유하와 함민복의 시에서 공통점이 나타난다. 그들은 둘 다 소비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고, 또 시집 안에 유년의 공간을 삽입한다. 80년대 시인들이 정권 비판에 몰두했다면 90년대 시인들의 비판 초점은 소비 자본주의에 놓여 있다. 좀 더 살펴보아야 할 일이지만 90년대 시인들이 소비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 반대 공간으로 유년의 공간, 사람과 사람이 연결된 공간을 시 안으로 들여온 것이 아닌가 싶다. 서로를 소외시키지 않던 공간으로 유년의 공간은 모든 시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것 같지는 않다. 유하의 하나대는 시집에서 적절하게 배치시켜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도 분리되어 버린 공간이다. 그래서 그 곳은 마냥 아름답기만 하다. 작위적이고 유토피아적이다. 그래서 유하의 하나대는 건강하게 보이는 삶에 공간이 될 수 없다. 단지 회상의 공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공간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읽는 이로 하여금 소비 자본주의 시대와 분리된 의식적이고 닿을 수 없는 저 높은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함민복의 유년의 공간은 그렇지 않다. 함민복의 유년 공간은 끊임없이 지금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예로 그의 어머니에 관한 시를 들 수 있다. 유하의 하나대가 이미 죽어버린 증거는 그는 그 이후의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함민복의 어머니는 현재적 의미로 함민복의 시 편에 변화하며 등장한다. 시집 ꡔ자본주의의 약속ꡕ에서 함민복은 본격적으로 소비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첫 번 째 시집 ꡔ우울氏의 一日ꡕ에서 현재와 분리되어 버린 유년의 공간이 한없이 시적 화자를 한없이 아프게 하며 단절만을 되새김질하게 했다면 시집 ꡔ자본주의의 약속ꡕ에서 소비 자본주의의 비판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그의 유년은 유년의 공간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에서도 끊임없이 그러한 공간을 찾아내게 한다. 형과 함께 일한 양돈 농가에서의 일들이 그것에 속한다. 그리고 시집 ꡔ자본주의의 약속ꡕ을 살펴보자면 유년의 공간이나, 현재적 의미로 변화한 유년의 공간이 소비 자본주의에 대해 쓴 시들 사이사이에 끼여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배치로 봤을 때도 그는 유년의 공간을 기억 속에 아름다운 공간으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소비 자본주의의 행태를 비판하는데 유용한 공간으로 살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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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에 대한 명상 - 제7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22
장정일 지음 / 민음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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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와 머뭇거림의 서정

1980년대 후반 남한 사회는 소비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소비사회를 파고들고 강압적인 자본제국주의 문화가 자리잡는다. 제국주의적 소비자본은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며 개인의 욕망을 만들어 내고, 스스로는 그 자리에서 도망간다. 소비자본이 낳은 것은 결국 도망가기이고 도망가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단절시킨다. 현실 공간의 삶은 도외시 된 채 거짓, 가상 공간의 이미지와 허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립되기도 한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소비자본의 모습을 장정일은 「햄버거에 대한 명상」에서 써내고 있다.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도망가는 소비자본의 이중적 속성을 캐내기 위해 그는 감동으로써의 시,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기존의 시 문법을 파괴한다. 이영준이 말한 날것으로 드러내기, 즉 감동을 파괴하는 시를 쓰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 구체적 형식을 환유적 서술에 중점을 두고 논의했다. 장정일이 사용하는 환유적 서술은 두 얼굴, 혹은 다중의 얼굴을 가진 제국주의적 소비 자본의 허상을 드러내는데 큰 몫을 한다.

장정일은「햄버거에 대한 명상」통해 제국주의적 소비자본의 허상 드러내기와 기존 시 문법 파괴를 동시에 행한다. 이것들의 밑바탕엔 아버지로 상정되는 중심, 권위적, 획일적인 것에 대한 부정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소비자본과 가부장제가 이어져 있다면 그의 부정의 실현가능성은 항상 위기에 내몰려 있는 욕망이다. 왜냐하면 장정일도, 시적 자아도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사회 현실, 바로 그 자리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장정일은 어떤 희망도 꿈꾸지 않는 것일까? 그의 욕망은 항상 좌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욕망의 대상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알고 보면 사람들은 모두 강정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골목 나설 때 집사람 먼저 보내고 자신은 가게
정리나 하고 천천히 따라가겠다는 구멍가게 김씨가
짐작이나 한다는 듯이 푸근한 목소리로
오늘 강정 가시나 보지요. 그래서 나는 즐겁게 대답하지만
방문 걸고 대문 나설 때부터 따라온 조그만 의혹이
아무래도 버스 정류소까지 따라올 것 같아 두렵다
분명 언제부터인가 나도 장정 가는 길을 익히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한밤에도 두 눈 뜨고 찾아가는 그 땅에 가면 뭘 하나
고산족이 태양에게 경배를 바치듯 강 둔덕 따라 늘어선
미루나무 높은 까치집이나 쳐다보며 하품 하듯 내가
수천 번 경탄 허락하고 나서 이제 돌아나 갈까 또 어쩔까
서성이면, 어느새 세월의 두터운 금침 내려와
세상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망각 속에 가두어놓고
그제서야 메마른 모래를 양식으로 힘을 기르며
다시 강정의 문 열고 그리운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끈끈한 강바람으로 소리쳐 울어야 하겠지
어쨌거나 지금은 행복한 얼굴로 사람들이 모두 강정 간다.
-「강정 간다」부분

사람들이 모두 가고 있는 그곳, 의심하던 화자까지 찾아가는 강정은 대체 어디인가. 시적 화자도 강정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그곳을 찾아가는 길은 어디서 배운 듯 익숙하다. 그 길은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이들을 끌고 간 죽음의 길 같기도 하다. 하지만 모두들 웃으며 가는 걸 보니 마치 유원지를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곳을 찾아가는 시적 화자도 자신에게 익숙한 길, 강정이라는 곳을 알 수 없어 주저하고 망설인다. 주저와 망설임의 서정. 그의 희망이 미끄러지며 내는 발자취. 그 발자취 역시도 금새 사라질까봐 강정 가는 그에게서 자꾸만 머뭇거리게 한다. 그래서, 그 희망은 범박한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미약하고 불안하게 깜박이는 카바이트불빛처럼 더욱 처연하고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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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떼들에게로의 망명 - 제11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112
장석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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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찾아서
시인이 근대가 상실한 것을 치유하기 위해 찾아가는 자기 동일성의 세계는 어디일까? 여러 평자들의 글에 나타나는 바로, 그것은 장석남이 유년시절을 보낸 德積島 덕적도는 장석남 시인의 육체적 고향인 동시에 정신적 원체험의 공간이다. 그 곳은 「德積島 詩」에서도 나왔듯이 인천에서 80여 킬로미터 떨어진, ‘소야도가 문갑도로 문갑도가 다시 굴업도로’ 40여 개의 작은 섬들을 이루고 있는 덕적군도의 주섬, 덕적도이다. 그는 그곳에서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살면서 저물녘의 풍경을 바라보며 시심을 키웠다.(하상일, 위의 책.)
다.
하상일은 ‘덕적도가, 장석남의 유년세계가 삶과 죽음의 우주적 질서 속에서 고통, 슬픔을 이겨내고 비로소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이 환하게 열리는, 서정적 풍경이 한 편의 영화 속 아름다운 배경처럼 흐르는 곳’ (하상일, 위의 책.)이라고 말하고 있고, 고봉준은 그의 유년 세계가 타자가 틈입할 수 없는 완전한 자기동일성으로 구축된 공간 (고봉준, 위의 책.)이라고 밝힌다.
물론 그의 시에서 덕적도와 유년세계는 자연과 조화로운 삶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온전한 세상은 아니다.

밥을 먹을 때 나는 자주
밥 냄새 끝까지 달아나 있다

어느 미래에 나는 배고프지 않은 기억 밑으로
수저를 던질 것인가

나는 조용히 수저를 놓고 그들과 함께
몸 비틀며 반짝일 것이다
-「밥을 먹으며」
우리집 굴뚝 위 연기는
우리집을 어디론가 데리고 가고 싶어했지
그 연기를 나는
너무 많이 보았다
-「배호1」

그의 유년세계는 김수이가 언급했듯이 현재에도 여전히 삶의 시장기( 김수이, 「견딤과 그 이후」, 『文藝中央』, 21호.
「밥을 먹으며」이 외에도 먹는 모습이나, 먹는 이야기가 그의 시에서 많이 등장한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새떼들에게로의 망명」),「생선구이 백반」,「감자를 먹는 노인」,‘여의도 분식집에서 저녁밥을 먹고’(「저녁의 우울」),「초저녁 ‘밥별’이라는 별」등이 이에 속한다. )를 느끼게 하는 배고픈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배고픔을 던져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러한 바람은 ‘우리집을 어디론가 데리고 가고 싶어했지’라는 연기의 행로로 나타나기도 한다. 배고픔의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또한 동시적으로 존재했던 곳이 덕적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장석남이 그리고 있는 자아동일성의 세계는 덕적도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보다, 덕적도에서 경험한 아궁이와 불, 어머니로 연결되는 어떤 세계다. 덕적도가 아닌 그 세계들을 그는 ‘먼 곳’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다시 기타를 치면 자꾸
먼 세상이 울린다
-「歌1」부분

내가 그믐이니 만월이여……먼 곳이여!
-「내가 그믐이니」부분
나는 안 보이는 나라를 편애하는 것이 틀림없어
-「진흙별에서」부분

이 먼 곳은 진흙별이거나, 나와 당신이 웃고 만나 순한 돌멩이 같은 아기를 낳고, 순전한 아이가 꽃을 피우면 마을 사람들은 온전하게 마음이 환하여 잠을 못자는, 상상만으로도 가슴 부풀고 부족함 없이 마음 가득 차는(「그리운 시냇가」) 공간인 ‘그리운 시냇가’일 것이다.
이러한 순전한 공간을 동일성의 세계로 상상할 수 있는 그의 원체험의 공간인 덕적도, 그 ‘별의 감옥’을 이종환은 자신 역시 한 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종환, 「부재의 시간들이 걸려 있는 시편들」, 『현대시세계』, 14호.
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런 원체험의 공간조차 가지지 못한 필자로서는 별의 감옥을 갖은 자들의 행복을 훔쳐내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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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의 잠 문학과지성 시인선 105
김기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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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된 사람들
-김기택,『태아의 잠』과 『사무원』


시인과 언어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다. 그 언어에 대한 감각이 천부적인 사람이 있다. 그는 능숙하게 언어와 함께 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언어와 놀 수는 없어도 그에게 세상은 자꾸만 시로 기록하라고 말한다. 김기택은 후자에 속하는 시인 같다. 그에게서는 언어를 쉽게 부리며 노는 여유로운 모습을 시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시는 산문시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풀어지는 언어,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언어들은 단단하게 묶여있다. 그의 언어들이 가지고 있는 힘은 그의 노력, 즉 대상을 면밀하게 관할하는데서 나오는 듯 하다. 특히 사람들의 자그마한 행동, 딸꾹질이나 걸어가는 모양새 그리고 웃는 모습 등을 그리는 시는 생생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하다. 그의 섬세한 언어들은 현대인들의 일상적인 기만을 벗겨내기도 한다.

그의 시에서는 기교를 보기 힘들다. 그는 성실하게 대상을 바라보며, 언어 역시 성실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 성실함 때문인지 그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현대인들을 비판의 초점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자신 역시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비판만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루하지만 생동하는 것들을 그려내기도 한다.

축소된 현대인들1-기만
현대인들은 대부분 일상에서 서로를 기만한다. 그들은 독립된 공간을 갖고 살아왔으며, 누구도 그 공간을 접근하길 꺼려한다. 가족마저도 말이다. 사실 그것은 독립되었다기보다 서로를 소외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들은 가까운 이들도 서로 경쟁상대로 인식하며, 자신을 꺼내 보이는 일은 상대에게 흠을 잡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블로그, 싸이라는 인터넷 공간에 개인 매체가 생겼다. 그들은 서로의 일상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들 역시 가려 쓰거나, 비밀글이 되어 있다. 때론 너무 생활공간이 가까운 사람들은 그곳에서 접하는 일을 꺼리기도 한다. 그러한 현대인들의 서로를 향한 기만은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일이다.

『태아의 잠』중에서「너무 웃으면 얼굴이 찌그러진다」은 늘 웃음을 습관처럼 흘리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자세한 관찰을 통해 그들이 정작 웃고 있지 않음을, 오히려 억지로 웃어야 하는 상황에 지겨워하고 있음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일은 일상에서 비일비재하다. 혹 「너무 웃으면 얼굴이 찌그러진다」를 읽고 있는 거의 모든 독자들이 자신의 상황이다! 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해서인지 우리는 억지웃음을 늘 짓고 있다. 별로 웃기지 않은 상사의 말에, 아버지의 말에, 선생님의 말에, 어른의 말에 예의로 웃고 있는 사람들. 그것을 우리는 가식이라고 말한다. 가식에 익숙해져버린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포착해내면서 그들의 속내를 드러내는데 김기택의 정직한 언어는 적절하다.

축소된 현대인들2-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
서로를 소외시키는 현대인들은 서로를 기억하지 않는다. 김기택의 미세한 관찰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 화석이 되가는 현대인들을 끄집어낸다. 그의 시「사무원」,「화석」,「조성환의 죽음」,「껌뻑이 兄」들이 그에 속한다. 그들은 모두 말단 직원이거나, 껌뻑이 형처럼 한번도 제대로 햇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햇빛을 보지 못했다함은 자신의 가치를 그렇다하게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갔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조성환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조성환처럼 이미 죽었거나 죽어간다. 시에서 보자면 조성환은 힘도 없고, 빽도 없는 소시민이다. 그가 결국 어떤 위치에도 자리잡아보지 못하고, 혹은 그래서 짝도 없었으며, 그렇기에 자식조차 없는 그래서 정말 아무도 그의 죽음을 모른 채, 버려지듯 죽어갔을 수도 있다. 이는 상상이지만 현대사회에서 그리 비상식적이지도 않다. 실제로 우리는 주변에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들었거나 봐왔다. 우리가 만든 물건을 우리가 버리듯이 그렇게 우리 역시 죽어가고 있다. 김기택은 그렇게 버려져버린 그들의 비극을 오히려 희극적으로 표현하여 우리에게 깊은 비극으로 각인시킨다.

하지만 김기택의 언어는 우리를 비극으로만 몰고 가지 않는다. 비루하게 살아가지만 그것 속에 작은 움직임을 김기택은 표착해낸다. 「다리 저는 사람」이나 「대칭-사팔뜨기」가 그러하다.
「다리 저는 사람」에서 살펴보자면 그는 다리가 불구인 사람이다. 김기택은 그의 걸음걸이를 앞만 보고 가는 사람들과 비교해 춤추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다리 저는 사람의 신체는 그의 다리 한쪽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의 균형을 위해 온 몸이 힘을 다해 움직이고 있다. 이를 춤추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 것은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우리의 시선의 교정을 요구한다. 「대칭-사팔뜨기」역시 한쪽의 장애를 위해 온 몸이 균형을 잡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의 모습에서, 그들을 그려내는 김기택의 언어에서 우리는 빈 곳을, 부정을 매꾸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사람들의 생동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오히려 걷는 것에 대해, 땅에 발 디디고 사는 것에 대해 아무런 감각 없이 살아가는 우리가 죽어있는 몸을, 죽어있는 생각을 가진 건지도 모르겠다.

『태아의 잠』에서『사무원』으로 이행
특히 작지만 이렇듯 생동하는 생의 감각을 포착해내려 하는 김기택의 노력은『태아의 잠』에서보다『사무원』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동물이나 곤충에 관한 그의 시와 잠에 대한 생각은 두드러지게 변화했다. 『태아의 잠』에서 동물이나 곤충에 관한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소는 꼬리가 없는 불구의 모습이었고, 무료했다. 그리고 그들은 도축장에서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해 당당하게 태어난 것들이었다. 하지만 『사무원』에서 그들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여전히 그들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텅 빈,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아무도 없는 공간을 스스로 밀어 나아가며, 죽기 전까지 은빛 비늘을 튕기며 저항하고, 끝까지 살아남기 위한 저항은 닭살로 남아있다.
그리고 『태아의 잠』에서 잠은 연탄 가스를 마신 상태와 같은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했었다. 그래서 생명이 태동한다는 태아마저 무료한 죽음의 잠을 자는 모습을 우리에게 상기시켰다. 하지만 『사무원』에서 아이는 있는 힘을 다해 스스로 잠을 자는, 생이 꼼지락 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사무원』에서 잠은 잠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고 울음소리, 말랑말랑한 말소리로도 변화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위와 같은 면에서는 변화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김기택이 포착해내는 사물들은 섬세한 관찰 탓인지 비극과 희극의 모습을, 부정과 긍정의 모습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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